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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접대, 어떻게 변해왔나
뉴스종합| 2015-03-05 10:08
[헤럴드경제=서경원 기자]우리나라는 언젠부턴가 ‘접대공화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은밀한 접대문화에 대해 거부감도 차츰 사라져갔다.

‘갑’과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접대라는 수단을 고안해냈고, 그런 풍토가 이어오면서 익숙한 문화가 돼 버렸다.

시간이 흐르며 접대문화의 향응·뇌물 성격이 짙어지다보니까 점차 밀실화되는 방향으로 성격이 변모해갔다. 접대하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가 먹이사슬처럼 꼬리를 물었다.


공무원이나 정치인, 법조인 등은 물론이고 중소기업은 대기업 직원을, 납품회사는 유통업체 직원을, 제약회사는 의사를, 기업인은 금융기관 직원을 접대하는 식이다.

사실 밀실 접대 문화의 시초는 요정 문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전후로 기생집과 요릿집이 서울에만 3000개가 넘었다. 정치인, 경찰수뇌부 등 고위층들이 요정을 드나들면서 뇌물과 매수를 뜻하는 ‘사바사바’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1970년대는 요정의 전성기였다. 유신정국으로 민주적인 정치적 절차가 모두 마비된 가운데 고위 공직자와 재벌, 언론사 간부들은 고급 요정에서 만나 관계의 끈을 맺었다.

1980년대는 경재성장 및 통행금지 해제 등의 유화조치와 더불어 현대판 요정이라 할 수 있는 룸살롱들이 대거 등장했다.

고위층뿐 아니라 일반 회사원들도 접대 명목으로 룸살롱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룸살롱은 접대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비리성 회합이나 불법청탁이 이뤄지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선 룸살롱이 밀실형 성산업을 양산하는 곳으로 발전했다.

서울 강남에는 종업원을 200명 이상 거느린 기업형 룸살롱이 출현했고, 북창동을 중심으로 한 강북의 룸살롱들은 나신의 여성을 동원한 변태적 성접대를 영업전략으로 내세웠다. 


2000년대에는 IT 산업의 호황에 힘입어 벤처 기업인들이 룸살롱의 신규 고객으로 유입됐다.

룸살롱은 공간적으로 폐쇄돼 있어 보안유지에 용이하다는 점, 2차로 불리는 성매매 연결이 편리하다는 점 등으로 밀실 접대를 양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분석이다.

성접대는 진화를 거듭해 작년에는 한 건설업자가 강원도의 한 별장에서 사회 지도층을 대상으로 성접대를 벌인 사건이 공개돼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gi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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