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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저당잡힌 소비’…“日 잃어버린 20년보다 치명적”
뉴스종합| 2015-05-07 11:12
日 1980년대 후반 부동산 버블 붕괴
기업·금융, 부채 줄이기에 불황 가속
2000년대 稅 인상·가처분소득 급감

가계부채 심각, 저출산·고령화 덮쳐
우리경제도 日 전철 밟을 가능성

일자리·노후·주거 등 3대불안 가중
소비심리 위축 구조적 문제 해결해야
베이비붐 세대 은퇴후 불황 대비 가능


‘늘어나는 소득에도 불구하고 소비하지 않고 저축에 열을 올리는 국민’은 일본의 1990~2010년대 장기침체,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스케치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소비심리가 살아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진단은 서로 달랐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해소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1980년대 후반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기업과 금융기관이 부채조정을 최우선시했다. 버블 시기 부동산의 시가 이상의 대출을 허용했기 때문에 부채비율 줄이기에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지출을 억제하면서 일본 경제는 금융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대차대조표’ 형 불황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4.4%를 유지하던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에는 1.1%로 낮아졌다. 


이 시기 일본 국민들의 저축률은 치솟았다. 갚아야 할 돈은 많았지만 자산 가격이 붕괴돼 미래에 쓸 돈이 없다는 생각에 소비를 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인소득 중 소비나 저축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0년대 들어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1997년 아시아 지역 외환위기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소비세를 인상하는 정책적 패착을 일으켰기 때문. 이 시기 일본 국민들은 가처분 소득까지 줄면서 더이상 저축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그러나 일본 경제를 위협한 요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1996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산과 소비를 할 인구가 줄어들자 성장률은 급격히 낮아졌고 노후에 자녀들의 부양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젊은층은 노후 대비를 위해 소비를 줄였다.

강두용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경제 역시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고 저출산과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2016~2017년 사이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가계부채비율 역시 2010년에 GDP 대비 80%까지 치솟았다. 강 선임연구위원은 “가계부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일본 자산 버블 붕괴처럼 본격적인 불황을 이끄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며 “단순 금리 인하는 오히려 가계부채 문제를 부추길 수 있는 양날의 검이므로 실물 위주의 처방을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한국 경제가 일본형 장기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는데 동의했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시기가 한국보다 10~20년 앞선 만큼 한국에서도 인구학적 변화의 충격이 2010년대 중반에 밀어닥칠 것이라는 얘기다.

이 연구위원은 “그나마 일본은 버블 시기에 자산축적이 잘 돼 있어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마저도 없다”며 불황의 충격이 더 강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연구위원은 돈이 있어도 소비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소득이 정체된 측면도 있지만, 노후불안으로 소비를 유예하고 있는 것”이라며 “또 일자리 불안으로 미래소득이 불안하면 소비를 안하는 측면도 있고, 최근 전세가격이 오르고 월세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주거불안도 소비 성향을 억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연구위원은 “평균소비성향을 높이려면 돈이 있어도 못쓰는 것을 해결해야 한다”며 “호화로운 소비 자체를 터부시 할게 아니라 고소득 자산가들이 쓰게 하는 것이 선순환의 출발이 될 것”이란 처방전을 제시했다.

권규호ㆍ오지윤 한국개발원(KDI)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의 고령층은 기대수명은 늘어나지만 정년 등 근로가능시간은 늘어나지 않으면서 은퇴 시기가 다가올수록 소비를 줄이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미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로 허리가 휜 40대가 은퇴할 시기가 되면 불황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교육 및 채용 시스템은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줄이도록 정비해야 하고 가계 지출 역시 자녀 교육과 노후를 대비할 저축 간에 균형을 맞출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연구위원은 “최근 일자리 불안, 노후불안, 주거불안 등 이른바 3대 불안 때문에 평균소비성향이 저하되고 있는 것”이라면서 “비정규직 문제, 높은 집값과 전세난 등 소비 심리를 위축시키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베이비붐 세대 은퇴 후의 불황을 대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원호연 기자/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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