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람난세계사] 400만 흑인에 자유를…링컨은 노예 해방론자였을까
HOOC| 2015-06-12 11:04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

이 한 마디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과 국가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한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그는 아마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며, 우리에게도 흑인 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친숙한 인물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남과 북으로 분열된 연방을 대통합으로 이끌어낸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링컨은 정말 ‘노예 해방론자’였을까요?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링컨에게 노예 제도 폐지는 정치적 득실에 따라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거든요. 19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서 노예 제도가 도마에 오른 건 그 제도가 비윤리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더 중요한 문제는 서쪽으로 확대되는 영토를 두고 남부와 북부의 대립이 끊이질 않았다는 점이었죠.

식민지 시대 이후부터 대규모의 농장이 발달한 남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완고하게 노예 제도를 옹호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가 절실한 시점이었습니다.

이처럼 북부와 남부의 이질적인 경제구조는 자연환경에 의한 것이었지만, 제임스 M. 바더맨은 애초부터 서로 다른 이주민이 정착해 살았던 것도 이런 차이를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남부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토지 상속에서 배제된 지주 계층으로 남부에 대농장을 짓고 노예를 부리며 고향의 귀족 생활을 누리는 반면, 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근면과 자기 절제라는 노동 윤리에 충실한 청교도인이었단 것이죠. 

아무튼 이런 이유로 새로 연방에 가입되는 주(州)가 노예주가 될 것인가, 자유주가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연방정부가 북부 상공인들을 보호하겠다고 영국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기까지 하니, 영국 제품으로 사치를 하던 남부 귀족들이 연방으로부터 이탈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고요.

이런 가운데 1860년 북부 출신의 공화당 후보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분열된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 그러나 ‘노예제 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남부를 고립시키려는 링컨의 태도를 신뢰할 수 없었던 남부연합군은 이듬해 4월 북부 연방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길고 가혹했던 4년간의 남북전쟁은 사흘 꼬박 전투가 계속된 게티즈버그에서 끝내 승패가 갈립니다. 남부연합군의 백기. ‘1863년부터 남부의 모든 노예가 자유의 신분이 된다’는 내용이 골자인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문’에 따라 400만 명의 노예들이 자유를 찾게 되죠. “백인과 흑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던 링컨이었지만, 이 선언으로 남부의 흑인들이 대거 북부로 넘어옵니다. 링컨은 도덕적으로도 우위를 확보하게 되고요.

“내가 단 한 사람의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도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역시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들 중 몇 명만 풀어주고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남북전쟁 중인 1862년 8월, 링컨이 ‘뉴욕 트리뷴’에 기고한 글입니다. 링컨의 관심사는 언제나 다수의 지지로 연방정부를 유지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링컨이 노예 해방의 공로자로 역사에 기록된 건 그가 노예 해방론자들의 여론이 들끓던 시대에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 덕분입니다. 

이정아 기자/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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