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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野史] '뉴DJ' 한 길로…野 백가쟁명 시작됐다
헤럴드경제| 2015-09-27 10:10
일주일 만에 세개의 신당(新黨)이 깃발을 들었다. 박준영 전 전남지사의 신민당(15일), 천정배 무소속 의원의 개혁적 국민정당(20일), 박주선 의원의 중도개혁민생실용정당(22일)이 연이어 비전을 선포했다.

독자 신당 앞에 놓인 길은 험난하다. 양당 구도인 한국 정치의 현실을 감안하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계의 눈이 이들에 쏠리는 이유는 야권의 구심점이 흔들려서다. 주류인 친노(친노무현)가 제1야당의 당권을 잡았지만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은 불안하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흔들리는 리더십을 가만둘리 없다. 잇단 신당 등장은 야권 구심점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이다. ▶관련기사 4면


DJ 이후 사라진 야당의 구심점=제1야당의 근간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1987년 대선 전 ‘김영삼’ 중심의 통일민주당을 이탈한 동교동계가 DJ를 대선후보로 추대하면서 창당한 평화민주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1992년 대선에서 YS에 패배해 정계를 은퇴하기까지 DJ는 재야세력들을 영입하며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으로 몸집을 키워 제1야당의 체제를 구축했다.

DJ는 1995년 정계은퇴 선언 3년 만에 복귀한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199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뤘다. 2000년에는 재야 세력, 운동권 주도 세력 등을 영입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고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근간을 마련했다. 숱한 자가분열이 있었지만 DJ라는 구심점은 흔들리지 않았다.

현재 야당 내분의 시작은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이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시작된 호남과 친노의 갈등이 2003년 집권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검을 계기로 폭발했고, 결국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DJ의 민주당과 결별 수순을 밟았다. 2004년 노 대통령 탄핵 당시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힘을 모아준 것도 봉합되기 어려운 상처다. 현재 친노와 비노의 갈등도 여기서 시작됐다.

열린우리당이 성공했다면 DJ에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노 전 대통령은 ‘뉴DJ 1호’로 평가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이른바 ‘폐족의 길’을 걸었다. 2007년 김한길 의원이 20여명을 이끌고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주축으로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면서 현재까지 탈당→창당→합당을 거치며 당명이 4번이나 바뀌었고 당 대표는 17번 교체됐다. 어떤 리더십도 인정받지 못했다. 계파 갈래가 더 복잡해지면서 갈등은 극에 달했고 총선, 대선을 앞둔 현재 또 한번의 분당(分黨)위기에 직면했다.

▶‘뉴DJ’ 향한 치열한 백가쟁명=전문가들은 지금의 야당 분열을 ‘공통분모의 부재’라고 입을 모은다.

김준석 동국대 교수는 “과거에는 김대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대통령이라는 공통 분모로 정권을 유지했는데 이후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공통분모가 사라졌다”며 “정책으로만 당을 묶어두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도 “야당은 강력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리더십이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뉴DJ’의 자격조건은 당의 형태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얻고 야권을 뭉치게 할 비전이다. 신당 세력들이 경쟁적으로 개혁과 대안을 강조하는 것도, 차기 대권주자인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전 대표가 혁신 경쟁을 이어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과거 대통합민주신당, 민주통합당 만들어서 선거에서 이긴 적 있었나. 통합 안하면 (선거에서)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질 거면 통합해도 진다. 역대선거가 보여준다”고 했다. 단순한 통합, 어설픈 동거로는 공통분모를 만들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수진ㆍ장필수ㆍ양영경 기자/sjp1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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