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대중연설 첫 마디는 늘 이렇게 시작했다.
건국 이후 민초들의 설 자리가 없었던 근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그 역사를 이끌었던 그였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일 영면에 들었다. 올해 향년 88세.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화가 놓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양김(金)’으로 불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와 함께 상도동계를 이끌며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이뤘던 김 전 대통령은 정부의 타이틀을 ‘문민정부’로 선포하며 군부독재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정치 이력은 1954년 만 스물여섯으로 헌정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경남 거제에서 부유한 어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자신의 책상에 써놓을 정도로 남다른 포부를 가졌다.
이승만 정권 당시 권력 핵심이었던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이 전 대통령의 면전에서 3선개헌 불가를 직언했다가 묵살 당한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며 고된 야당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5ㆍ16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정치적 사명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그 방향을 잡았다.
군정연장 반대에 참여했다가 형무소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군사독재 연장에 반대했다가 초산테러를 당하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그의 ‘민주화’ 열망은 꺾일 줄을 몰랐다.
이후 그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장기집권에 나선 박정희 정권에 항거해 선명성을 강조하며 강경투쟁을 이끄는 야당지도자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정권과 극우보수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던 도중 급기야 1979년 ‘YH여공 시위’사건을 계기로 헌정사상 처음으로 의원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다.
10ㆍ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종식되고 온 나라는 민주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12ㆍ12사태와 신군부의 5ㆍ17비상계엄으로 군사정권이 이어지면서 그의 민주화 투쟁도 계속됐다.
5공화국 수립 이후 가택연금과 정치적 탄압이 이어지자, 김 전 대통령은 재야인사들을 규합한 ‘민주산악회’를 기반으로 야권통합의 기치를 세웠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민주화추진협의회’다. 당시 민추협은 김 전 대통령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대중 계열 정치인들도 대거 참여, 당시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의 모태가 됐다.
군사정권과 대척점에 서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그에게 ‘3당 합당’은 당시 야권 지지자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는 계기가 됐다.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았던 그에게 돌아온 소리는 정권을 잡기 위해 군사정권과 손잡은 ‘변절자’이자 ‘대통령병 환자’라는 악평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회고록을 통해 “쿠데타 정권의 재등장을 막고 이 땅에 영원한 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제3의 길을 찾았다”며 자신의 선택이 민주화 정착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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