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월과 2월 한달 사이에 나란히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개인적 교류와 우의를 나누며 5년간 파트너로서 한미관계를 이끌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인생’(My Life)에서 1993년 7월 방한했을 때 영빈관에 머물던 일을 떠올리며 “엘비스 프레슬리에서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수영을 했다”며 “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의회연설이 끝난 뒤 나는 오랜 한미동맹에 대한 감사와 그것을 유지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국을 떠났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한 데 이어 199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하면서 북핵위기가 증폭되자 한미간에 불협화음이 빚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이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핵 동결 대신 경제원조를 주고받는 합의를 도출하자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강화해야지 태도를 완화해서는 안된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과 미국의 대북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문민정부 시절 한일관계도 급락을 되풀이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며 한일관계 개선에 공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가 외교쟁점으로 불거지면서 한일관계는 좀처럼 답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95년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청 장관이 ‘한일 합방으로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고 망언을 쏟아내자 김 전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강경하게 응수했다.
이후 한일간 독도문제와 어업협정 개정, 배타적경제수역(EEZ) 등 악재가 잇따랐다. 그래도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와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가 모두 문민정부 때 발표됐다는 점은 평가할만한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 임기기간 남북관계는 한층 더 극적인 부침을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며 북한과의 적극적인 화해ㆍ협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는 데까지 나가게 됐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김일성 주석과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까지 합의했으나 김 주석이 정상회담을 2주 앞둔 그해 7월8일 돌연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한국에서는 김 주석에 대한 조문을 둘러싼 ‘조문파동’이 촉발되면서 남북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말았다.
한편 이전의 한반도 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ㆍ발전시킨 김 전 대통령의 남북 화해ㆍ협력, 남북연합, 1민족 1국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역대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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