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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문화경영대상 예술인-정기웅 조각가] 空이 만들어내는 울림…다시 태어나는 ‘생명’
헤럴드경제| 2015-12-29 11:51

인간의 몸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시도는 수천 년의 도돌이표이자 클리셰지만 지루하지 않다. 살아 움직이기에 아름답고 똑같은 양감을 갖고 있지만, 죽어 굳어진 고깃덩이에서 느껴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조각가 정기웅 작가는 그 무언가를 ‘생명’이라고 하면서, “몸은 살아있고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 모습과 형상을 찾아서 작품으로 표현했다. 처음에는 이런 속성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단순한 형태로 나타냈는데, 이 형태는 압축과 생략을 반복하면서 완만하고 둥글어졌다”라고 말한다. 몸을 한 덩어리로 압축하니 생명성을 간직한 씨앗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M, F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둘의 합일체(Human Being)인 H가 태어났다. 생명은 언젠가 본래의 형태를 잃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기에, 정 작가는 인간형태를 단순화, 압축한 후 쪼개 보고 쌓아 보았다. 새로 만든 영역에는 다른 음영이 생겼고 다른 각도에서 볼 단서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 공간을 비워 내니 공(空)의 영역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생겼다. 그렇게 개체는 압축과 단순화, 응축을 거쳐 무(無)의 공간에서 나눔과 비움이 시작되며 살아있는 울림은 더욱 분명해진 ‘생명(L;Life)’이라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마음속의 단서를 표현하고 의미를 만들어낸 작법을 가진 작가들과 달리, 정 작가는 연금술사처럼 몸을 재배열하는 시도를 통해 한 단계씩 나아갔다. 정 작가에 따르면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생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L을 형상화하고, L의 또 다른 이름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표현한 L이 지닌 신령함을 현실의 ‘삶’으로 전이시키는 몸의 변이 과정이다.

정 작가의 작품에는 살아있는 상태와 변이되어 재구성된 형태가 공존한다. 죽음을 압축하고 잘라낸 단면을 쌓아올리는 다미엔 허스트의 작품에서 정교한 비생명성을 느낄 수 있다면, 현실을 반영하고 이름을 붙이는 철학적 접근 끝에 완성된 정 작가의 L 시리즈들은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에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그는 “성을 구분한 역할이었던 M,F,H의 단계를 지나 요즘은 작품에 생명의 첫 글자 L을 사용하고 있다. 돌과 금속으로도 시도해 보았는데, 생명과 삶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배열하기 위해 소재를 바꾸었다. 3년 전부터는 사람에 대한 실제 사진을 담아서 구체적인 인간화, 피조물을 만드는 창조주의 기분을 느껴봤다. 그 후에 L아담, L이브를 완성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2015 조각페스타> 출품작에서는 삶에 대한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대상성을 부여받고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진이 공간에서 중첩되어 인간의 입체 토르소로 단순화됨과 동시에 마치 입체 등고선처럼 보인다. 생각해둔 느낌에 부합하게 그 사진을 투명도가 조금씩 다른 아크릴, 유리, 폴리카보네이트(PC)소재에 붙여 만든다. 직접 모델을 데려다가 표현하는 것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모델 사진이 아니라, 데이터를 모아 모델링한 사진으로서 내 마음대로 해부학적 조합, 포지셔닝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점층적으로 쌓이면서 그 사이에 투명한 공간을 주었기에 여러 각도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이 있고, 그 울림이 작품에서 삶의 가치와 상징성을 더 부각해주는 것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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