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먹의 신비함을 채색하는 탁양지 화백의 산수화
헤럴드경제| 2016-01-25 17:13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종이 위에 산수를 쓰고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자연친화적인 재해석을 담아 온 탁양지 화가의 그림에는 붓으로 그려낸 서사와 운율이 묵직함을 벗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배경을 투시하고 재배치하는 마음의 눈이 필요한 산수화에서, 탁 화가는 심원과 평원을 기준으로 광활하고 담대한 배경 안에 절제되고 감성으로 걸러진 자연을 그려 넣었다. 탁 화가는 남종화의 수묵 담채 농도를 만들어가면서도, 실경산수화의 만연하고 사실적인 호화로움 대신 시선 구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자연물들의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탁 화가는 1980년대 이후부터 오방색과 농담의 대조를 이용한 색산수 담채화를 그리면서 한국화의 공식에 익숙한 수집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관념 속에서 페이드인 되듯 들어오는 자연의 피조물들과 웅장한 병풍 같은 파노라마적 구도를 품격 있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속 앵글에서 한국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고즈넉한 돌과 바위들이 웅장하고 묵직하게 드러난 바위산 절경 속에서, 광활함과 중첩된 산맥 사이의 여백을 만나 그림 속을 거니는 듯 여백의 미로 마무리된 동양화의 미덕을 지켜내는 것은 개성적인 산수의 면면을 표현하는 것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동양화에서 흔치 않은 원색 채우기, 여체를 방점으로 찍은 중동의 이국적인 풍경에서도 탁 화가가 지닌 고전의 품격과 멋스러움이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산수도의 기반인 시, 서화, 작가의 주문(朱文) 낙관인장을 갖춘 형식미가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틀 안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탁 화가의 색채감각 덕분이다. 다양한 준법(皴法)을 유지하며 복잡함을 내려놓은 것은 산과 바위에 대한 동양화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보이고, 도색하는 붓의 방향과 결을 살려 한 가지 색으로 바위의 질감을 나타내는 현대적인 기법은 흥미를 유발한다. 

그 외에도 사물을 그릴 때 구륵법으로 필선의 내부를 사실적이고도 정갈하게 채우기도 하지만 선농후담의 파묵법으로 단색을 칠한 뒤 필선을 그은 전통적인 방식에 공을 들인다. 절경 사이의 구름과 물결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담하게 마무리한 화풍 또한 탁 화가의 여러 가지 시도 중 좋은 평가를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림과 그리움은 아마 어원이 같을 것”이라고 작품에 깃든 정서를 말하는 탁 화가는 중봉운필의 붓으로 고향과 자연을 이야기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풍속 민화처럼 소위 해석하는 그림에서 그러하듯, 굳이 설득을 위해 세필로 사물을 정밀 묘사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점점 흐려지는 농담으로 여운을 남기기도 하지만, 산을 조망하고 운필로 서사하는 산수의 면면들을 재조명하고 상상력으로 다시 조형하는 과정에서 담백한 맛, 여유로운 품격을 남기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한 독창성이 전통의 형식을 충실히 빌려 나타난다는 것이 탁 화가의 그림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탁 화가의 산수화는 그러한 필묵의 자유로운 유람을 발견한 뒤 자연이 주는 감동을 극대화하는 ‘해향 시리즈’에서 그리움의 정서를 만나 완성 단계에 올라섰다. 이렇듯 격조와 자유로움의 이상적인 중용을 화폭에 담고 있는 탁 작가의 독창적인 행보를 앞으로도 꾸준히 볼 수 있다는 것은 필묵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진정 행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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