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이형석의 영화X정치] 우병우와 안종범, 그리고 ‘검사외전’과 ‘책읽어주는 남자’
뉴스종합| 2016-11-12 12:06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더 이상 최순실이나 박근혜 대통령 개인이 문제가 아니다. 점점 더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커넥션이다. 권력의 최정점에서 관료사회와 민간기업의 말단까지로 완성되는 ‘그림’이다. 여기서 정치ㆍ경제ㆍ법조ㆍ문화 엘리트가 상층부를 이룬다. 그 가지의 끝에는 “뭔가 이상하지만 위에서 시키니 한다”는 이들, 유기체같은 이 방대한 커넥션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관료와 정당인, 기관인, 기업인, 민간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잇따른 폭로와 수사를 통해 점점 확실해지는 것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단지 한 두명의 개인들이 아닌, 몇 년간을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에서 살아 움직인 커넥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규모는 정확히 가늠조차 어렵다. 그리고 그 커넥션은 단지 요 몇 년간만이 아닌 수십년간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좀 더 기괴한 형태혔을뿐이다. 사실 그래서 만천하에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주연을 철저히 숨긴 채, 그리고 숱하게 갈아치우며 진행된 드라마나 리얼리티쇼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국민들을 가장 소름끼치게 한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 최근의 정국과 검찰 수사는 수많은 주연과 조연, 그리고 단역을 무대에 올렸다. 전무후무한 블록버스터급 풍파를 일으킨 만큼, 등장인물들도 많다. 영화나 공연으로 치자면 전체 내용은 전혀 몰라도 상관없는 단역이 있는가 하면 판을 주도하는 주인공과 작품을 기획ㆍ연출한 이가 있다. 이권이 달린 투자자들이 있고, 최종적으로 수혜자가 되는 극장주가 있다.

‘타짜’ 시리즈 등으로 익숙해진 영화 속 도박판을 예로 들자면 ‘설계자’가 있고 ‘기술자’가 있고 ‘바지’(바람잡이)도 있고, ‘꽁지’(사채업자)도 있다. 음료 심부름꾼부터 ‘하우스’(불법사설도박장) 주인까지 제 각각의 역할이 있다. 목적은 하나 ‘호구’의 돈을 뜯기 위해서다. 최순실 국정농단에선 물론, 국민이 ‘호구’였다.

요컨대, 거대한 범죄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전모를 다 아는 극소수의 기획자, 즉 ‘머리’가 있어야 한다. 그 다음은 딱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을 갖고 실제로 움직여 기획을 실현하는 ‘몸통’이 있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는 ‘꼬리’가 있다.

정보의 양과 함께 배분되는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자신에게 돌아올 몫, 즉 ‘사적 이익’에 대한 확신이다. 두번째는 이것이 자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겐, 혹은 전체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여기에는 흔히 의리, 충성, 성실, 책임 이런 단어가 동원된다. 정보의 양이 많을수록, 즉 머리일수록 사적 이익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큰 큰 경향을 보여준다. 정보의 양이 적을수록, 즉 꼬리로 내려올수록 자신의 행동이 범죄와 상관없는 무해한 행위이거나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수도 있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한국영화 ‘내부자들’과 ‘검사외전’은 ‘머리’와 ‘몸통’들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주요 인물들은 누가 판을 주도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한다. 판을 장악하고 상대의 수를 먼저 읽어야 한다. 그들의 목표는 개개인들의 사적 이익이다. 돈이나 권력이다. 이들 영화에서 정치인과 언론인은 드러난 ‘플레이어’다. 검찰은 ‘숨겨진 플레이어’이자 판의 내밀한 조종자다. 

2008년작인 미국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정보에서 소외됐던 ‘꼬리’에 대한 이야기다. 문맹이었던 한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유태인 학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여인은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하는 사실상의 역사적 ‘백치’ 상태에서 나치의 부역자이자 전범이 된다.

악과 범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법적 처벌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 악행에는 악과 범죄에 대한 명확한 목적의식과 행동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했다. 인간적인 연민, 직업적인 성실성, 정치적인 신념같은 아주 평범한 이들의 덕목이 거대한 악행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인이 된다.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국회에 출석해 국회의원들의 질문을 받는 각 부처 장관들과 전(前) 대통령 비서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하게 된 ‘알리바이’가 있다. 최순실을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몰랐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주장해야 하는 일이다.

개인의 국정농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도록 최순실의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 알았어도 조사ㆍ경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고위 관료로선 잘못이다. 최순실을 몰랐다고 해도, 그가 개입한 비정상적 국가정책은 적어도 막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관료로선 더 큰 책임이다. ‘직업적인 성실성’은 악과 범죄를 완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검사출신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심문을 받는 사진과 기자를 째려보는 행동으로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은 최근 검찰수사에서 미르ㆍK스포츠재단 등 대기업 모금과 관련해 대통령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최순실 사태로 대중들의 눈앞으로 불려나온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국민들로선 참 이해가지 않는다 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린 시절 정의로운 사회와 부패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며 소년등과했던 검사출신 인사, 우 전 수석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경제학자였고 성실한 교수였으며 시민사회와 국가권력의 다리가 됐던 지식인, 안 전 수석같은 이도 있다. 대통령 주치의출신인 국립대병원장 등 최고 권위의 의사들도 있다. 촉망받았던 문화 예술인, 성공한 스포츠인도 있다.

대개는 돈과 권력을 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 존경까지 이미 이룬 사람들이었다. 과연 오로지 돈과 권력이 목표였을까 하는 의구심도 자아낸다. 그들에겐 모종의 확신, 이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거나 적어도 대통령을 위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거대한 범죄와 악이 가진 ‘평범한 얼굴’을 드러낸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종류의 범죄를 인류의 새로운 적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히만 재판에서 논란이 된 보다 큰 문제들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모든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이었다”고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아마도 우리 사회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바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발견했던 그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행하는 일과 최순실의 국정농단과의 관련성을 애초에 몰랐거나, 알았어도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았던 수많은 관료, 기업, 기관인들. 한나 아렌트가 표현한 바로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저지른 범죄”, 그래서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가정을 허물어뜨리는 악행. 

영화 ‘더 리더-책을 읽는 남자’에서 주인공 ‘한나’(케이트 윈슬릿 분)는 문맹이었고, 사실상 역사와 나치에 관한한 ‘백치’ 상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상태다. 사실상 백치 상태라는 말은 수많은 유태인들의 학살에 가담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반성적 사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악의 평범성’이란 결국, ‘무사유’다. 한나 아렌트는 책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아이히만)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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