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이형석의 영화X정치]용서받지 못한 자, 떠나는 자의 ‘명예’
뉴스종합| 2016-12-10 09:44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국회의 탄핵 의결로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로부터, 정치로부터 퇴장을 눈 앞에 두게 됐다. 당장 직무가 정지됐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이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최순실 등의 검찰 공소장에 적시된 박 대통령의 범죄 혐의와 추가 폭로되고 있는 ‘세월호 7시간’ 의혹, 악화 일로인 국민여론을 감안하면 헌법재판소도 기각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든 못 채우든 퇴임 후에는 일련의 범죄 혐의에 대해 사법적인 판단도 기다려야 한다. 퇴장은 돌이키기 어려워 보인다. 


▶떠나는 자에게 명예란 무엇인가

퇴장하는 자, 떠나는 자에게 명예란 무엇일까.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국민들로부터 박 대통령 퇴진 요구가 본격화된 지난 10월 하순부터 한달 반여간 국민들은 ‘명예’와 ‘질서’에 관한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질서있는 퇴진’과 ‘명예로운 퇴진’. 이 때부터 ‘질서’는 그냥 ‘질서’일 수 없었고 ‘명예’는 단지 ‘명예’일 수 없었다. 특정 정치 세력의 주장과 결부된 정치적 메시지가 됐다.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선 국민들이 이해하거나 용납하기 어려운 말들이었을 것이다. 국정을 사인(私人)의수하에 놓이게 함으로써 나라와 국민의 삶을 극도의 ‘무질서’로 몰아간 의혹을 받는 대통령이다. 그에게 보장해야 하는 ‘질서’란 과연 무엇일까.
‘명예’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씨로 인해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주술(샤머니즘)과 마약성 약물, 뇌물, 특혜, 정경유착 등이 얽힌 거대한 스캔들의 나라가 됐다. 해외 언론들이 앞다퉈, 매일같이 보도하고 있다. 피땀흘려 가며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이루고 OECD까지 진입하도록 해왔던 국민들의 명예가 처참하게 실추됐다. 국민과 국가의 ‘명예’를 훼손한 죄가 큰 대통령에게 보장해야 하는 ‘명예’는 무엇일까.
국정을 농단한 책임, 국정농단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권이 먼저 제안한 것이 ‘질서있는 퇴진’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적폐와 정치의 낡은 유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른바 ‘정치 원로’들이 꺼낸 것이 ‘명예로운 퇴진’이었다.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이고 권력ㆍ부패 앞에서 무기력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불명예를 자초했던 이들이 이른바 ‘정치 원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명예를 훼손한 대통령에게, 마지막 가는 길까지 ‘명예’를 지켜주길 ‘훈수’ 했다. 아이러니가 있다면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를 찾기가 쉽지 않을 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혹은 퇴장하는 자의 명예

떠나는 자에게 명예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명예로운 퇴장이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둘러싼 정치권과 여론의 다양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몇 편이 떠오른 것을 이런 질문들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배우로서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대단한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두 편의 작품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그랜 토리노’다. 다양하게 읽힐 수 있지만, 이들 작품들은 모두 떠난 자, 떠나는 자들의 이야기다.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퇴장했거나 퇴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이 돌려놓는 세상의 ‘질서’와 그들이 스스로지켜내는 ‘명예’에 대한 이야기다.
‘용서받지 못한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과거 무법자로 악명이 높았던 은퇴한 총잡이다. 아내를 잃고 돼지나 키우며 살고 있다. 그런데 농장일마저 잘 되지 않자 젊은 총잡이의 꼬드김에 빠져 다시 현상금 사냥에 나선다. 이 작품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난 시절 자신이 행해왔던 폭력,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된 살인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고 고뇌한다. 또 다시 폭력의 악순환 속으로 들어간 그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힘으로써 반복되는 살인과 고리를 끊기로 한 것이다. 그는 ‘결단’을 실행하고 마을을 떠난다.
배우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성공은 전적으로 ‘황야의 무법자’같은 웨스턴에서의 카우보이 이미지와 형사물 ‘더티 하리’ 시리즈에서의 응징자 역할에 힘입은 것이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과거 서부극과 형사물을 통해 구현해왔던 폭력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은퇴한 총잡이’의 ‘명예’다. 


▶‘그랜 토리노’, 후세대를 위한 희생과 결단

‘그랜 토리노’ 역시 명예로운 퇴장, 아름다운 떠남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은퇴한 노병이다. 아내를 잃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백인인 그는 대단한 인종차별주의자에보수주의자, 남성주의자다. 그의 이웃에 아시아계 소수민족 가족이 이사 온다. 그 가족의 소년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차를 훔치려다 잡힌다. 그 차가 바로 70년대산 ‘그랜 토리노’다. 소년을 추궁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소년이 동네 갱단의 위협 때문에 차를 훔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동네 갱단을 혼내준다. 이어 소년의 누나를 괴롭히던 일단까지 쫓아낸다. 이를 계기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소년, 소년의 가족이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던 중 갱단이 소년과 소년의 누나에게 복수를 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갱단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모종의 결단을 한다. 그는 스스로를 희생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그랜 토리노’는 떠나는 자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 퇴장하는 사람이 명예로울 수 있는 방법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후세대의 내일을 위한 결단과 실행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클린트이스트우드는 총잡이로서의 삶을 반성하며 더 이상의 불행한 총잡이가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결단을 실행한다. ‘그랜 토리노’는 완고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깐깐하기 짝이 없는 백인 노인이 아시아계 소년과 소년의 누이를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다. 그는 죽음을 무릅씀으로써 자신의 삶 전체를 내던져 반성과 결단을 이룬다.
반성과 성찰 없이 퇴장하는 자에게는 명예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퇴장한 자들에게 명예란, 후세대를 위한 결단과 실행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지, 하나마나한 말과 훈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퇴장하는 자에게 명예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비장한 결말의 영화로서 보여준다.
아마도,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명예’를 허락하지 않고, 정치 원로들의 ‘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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