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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석의 영화X정치]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와 켄 로치의 ‘진보’, 그리고 극단적 중도파
뉴스종합| 2017-01-21 08:00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지난해 꼬장꼬장한 두 노장 감독이 새 영화를 내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과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86세, 켄 로치가 80세다. 유난히 ‘조로증’이 심한 한국 영화계로서는, 나이 40~50만 넘어도 스스로 ‘꼰대’가 돼 버리고 마는 우리 사회 풍토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지만 이 얘기는 미뤄두자.

요샛말로 하자면 두 사람은 ‘일단 믿고 보는 감독’이고, 작품 안팎으로 이념 성향이 뚜렷히 구별되는 영화인들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공화당 지지자이자 정평 난 보수주의자이다. 켄 로치는 영국의 오랜 좌파 전통을 지켜온 예술인이다. 두 사람의 작품 또한 각각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교본’ 이기도 하다. 우파 혹은 좌파로서 근심하는 세상의 모습을 담아낸다. 온당한 의미에서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성숙한 가치를 작품 속에서 구현해왔다. 작품을 만들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욱 숙성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설리’와 ‘다니엘 블레이크’도 예외가 아니다. 이 두 작품은 현 정부의 무참한 실패를 딛고 우리 사회에서 지켜야 할 가치와 변화시켜야 할 구습과 낡은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따져봐야 하는 우리에게 보수란 무엇이고 진보란 무엇인지 묻는다. 

▶‘설리’, 엔진 손상 후 불시착 결정까지 208초, 155명 전원구조까지 24분

‘설리’는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지난 2009년 1월15일, 승객 155명을 태운 채 허드슨강 한가운데로 불시착한 US항공 1549편의 기장 ‘체슬리 설렌버거’(톰 행크스 분)의 이야기다. ‘설리’는 그의 애칭이다.

영화는 불시착 결과를 미리 밝히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 담아냈다. 여객기는 강물 위로 떨어졌음에도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살았다. 불시착 후 일부는 구명보트에 오르고, 일부는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강물에 빠졌지만, 155명 모두‘구조됐다’. 설리와 현장 책임자는 마지막까지 ‘155’라는 숫자에 집착한다.

당연히, 한국 관객에게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아마도 미국 관객에겐 없었을 종류의 느낌이다. 먼저 스크린 위로 숫자들이 겹친다. ‘476명 탑승, 304명 사망, 9명 미수습’이라는 세월호 참사의 기록이다.

불시착에도 탑승자 전원을 무사히 귀환시킨 기장 설리는 영웅이 된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 및 책임규명을 위해 소집된 국가교통안전위원회는 과연 허드슨강 불시착이 기장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를 두고 까다로운 심사를 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각종 증거 조사 결과는 여객기가 출발지인 라과디아공항으로 회항하거나 허드슨강과 가장 가까운 티터보로 공항에 착륙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했을 가능성을 가리켰다. 

“기장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했는가?”.

국가안전위원회가 설리에게, 설리가 그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다. 경비행기 조종대에 앉았던 젊은 시절부터, 전투기를 몰았던 군복무 시절까지, 수십년간 설리의 인생 전부가 걸린 물음이었다. 엔진 손상으로부터 불시착까지 208초간, 기장으로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은 증명될까. 설리는 208초간을 수없이 복기하는 한편, 또 하나의 ‘진실’을 길어올린다. 승무원들은 승객의 마지막 한명까지 보살폈고, 불시착을 전후로 허드슨강을 오가던 민간 통근용 여객선들은 연락을 받은 즉시 모두 강에 떨어진 항공기 주위로 몰려들어 구조에 참여했다. 경비대와 구조대, 응급의료진도 즉각 투입된다. 승객들은 차분하게, 서로를 배려하며 기장 및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랐다. 불시착에서 전원구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4분이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약자에게 잔인한 관료시스템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은 심장병으로 인해 병원에서 일을 절대 하지 말라는 판정을 받은 노년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다. 의사로부터는 일을 쉬라는 권고를 들었지만, 관련 당국에서는 ‘노동 능력 부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실업 급여를 받으려면 구직활동을 증명하고 인터넷 신청을 해야 한다. 모든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 통과해야 되는 관문이 다니엘 블레이크에겐 벽이다.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다. 상담사를 찾아 관청의 문턱을 수없이 넘어다녀야 하고, 긴 줄을 서야 하며, ARS 안내를 받기 위해서 수화기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기약없는 대기를 해야 한다. 인터넷 신청은 언감생심이다. 공무원들은 일을 서로 떠넘기고, 행정편의주의적인 원칙만을 내세운다. 다니엘 블레이크에겐 “된다”보다는 “안된다”는 말이 더 익숙하다. 항의라도 하면 쫓겨나기 일쑤다.

이런 사정은 아이 둘을 홀로 키우는 가난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분)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관청에서 우연히 만난 케이티를 도와주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둘은 서로에게 부녀처럼 의지하는 처지가 된다.

철없는 시절 남자를 잘못 만나 생계 자체가 어려워 인생을 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지만 케이티는 대학 진학을 꿈꾸며 일을 찾는다. 그러나 사회는 그녀같은 약자가 파고들 틈이 없다. 그녀는 복지와 취업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삶은 자꾸 나락으로 떨어진다. 

▶보수란 무엇이고, 진보란 무엇인가

두 작품을 ‘정치 영화’로 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좌우를 대표하는 두 영화인이 생각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이상적 가치가 작품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일단 주인공이 그렇다. ‘설리’는 지도자의 이야기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소외자, 소수자, 약자의 삶을 담는다.

‘설리’가 확인하는 것은 공동체가 오랜 동안 지켜온 윤리와 책임, 가치다. 설리가 구현하는 지도자상은 탁월한 능력과 판단력을 갖고 있으며, 오랜 경험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다. 208초 동안 설리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고, 24분 동안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파괴ㆍ붕괴 직전인 삶을 온전하게 회복했다. 보수주의가 강조하는 ‘경쟁’과 ‘자유’ 그리고 ‘질서’는 승자ㆍ강자ㆍ지도자의 도덕과 윤리, 책임과 능력을 전제로 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다. 여기서 공동체가 오랜 동안 지켜온 질서와 윤리는 ‘공공의 선’을 구현한다. 그래서 ‘보수’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체계적으로 배제된 패자이자 약자이며 피지배자의 이야기다. 영화가 확인하는 것은 체제의 모순과 불완전함, 불공정함이다. 진보주의가 관심을 갖는 것도 공동체라는 미명하에 기존 체제가 휘두르는 배제와 억압의 폭력이다. 보수주의가 ‘사람’을 문제삼는다면, 진보주의는 ‘체제’ 그 자체를 비판한다. 그래서 지도자의 덕목이 문제가 아니라 ‘약자의 연대’가 중요하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케이티가 손을 잡았듯이 말이다.소외자,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연대가 체제를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켄 로치의 영화는 오랫 동안 약자들의 연대와 체제의 변화 열망을 담아왔다.

▶한국의 경우

영화가 담는 가치처럼 한국에 과연 진정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있을까. ‘좌우 편가르기’가 일상화됐지만, 진정한 의미의 좌파와 우파가 서로 경쟁하고 있을까.

쉽게 긍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좌우가 싸워서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좌우가 정립되지 않은 것이 문제는 아닐까. 공동체의 보호와 지도자의 덕목보다는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해온 ‘가짜 보수’와, 사회적 약자의 연대와 체제의 변화보다는 ‘구호’와 ‘슬로건’만 흉내낸 ‘얼치기 진보’만이 주류가 돼 왔던 것은 아닐까.

‘새는 좌우로 난다’. 곧잘 인용되는 문구다. 사람의 두 눈, 두 팔, 두 다리, 결정적으로는 좌우의 뇌가 균형을 이뤄야 의도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듯이, 새도 좌우의 날개가 고루 발달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날개가 좌우의 정치세력이라면 몸통은 국민이고 국가일 것이다. 몸통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나르기 위해선 때로 좌선회도 필요하고 우선회도 필요하다. 왼쪽 날개에 더 힘이 들어갈 수도 있고, 오른쪽 날개에 더 무게를 실을 때도 있어야 한다. ‘선거’는 아마도 그 중 어느쪽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 어느 정치세력이든 모두 다 ‘중도’를 외치는 것은 한편으로 우려스럽다. 좌우의 날개가 다 발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 3의 날개가 몸통 가운데서 돋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노선과 이념이 분별정립되지 않은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얻고자 할 때 흔히 서로 구별되지 않는 선심성 공약,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철학없는 정책, 방법론 없는 공약 말이다. 극좌, 극우 말고 또 하나의 극단주의, 너무 이르게 도착한 ‘극단적 중도주의’는 아닐지.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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