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벤처기업부’ 신설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고무돼 있어야 할 벤처기업계가 울분에 빠졌다. “벤처라는 단어는 외래어이므로 신설 부의 이름에서 빼야 한다”는 논란이 확산하고 있어서다.
일부 시민단체가 정치권에 신설 부 명칭 정정을 요청하는 건의서를 전달하더니, 급기야는 지난 17일 여야의 정부조직 개편안 합의 과정에서 ‘창업중소기업부’라는 이름이 대안으로 합의됐다. 보수야당인 바른정당이 제안한 이름이다.
문제는 창업중소기업부라는 이름이 초기기업의 다양한 성장단계를 전혀 함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벤처기업은 크게 스타트업(창업기업), 성장형 벤처, 성공한 유니콘형 벤처로 나뉜다. 각 단계마다 필요한 자원과 인프라가 다르다.
신설 부가 창업단계뿐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혁신·벤처기업군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제도를 구축해야 함을 고려하면, 명확한 역할규정을 위해서라도 이름에 ‘벤처’가 포함돼야 옳다. ‘이름이 존재를 규정하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건 일찌기 증명된 사회·심리학적 명제다.
성급히 신설 부의 명칭을 바꾸려는 정치권의 시도는 벤처업계 전반에 ‘패배감’과 ‘무기력감’을 심어줄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1997년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특법)이 제정된 이후 20년간 9만개 가까운 벤처확인기업(벤처인증을 받은 기업)이 배출됐다. 이들은 대기업보다 높은 고용증가율을 시현했고, 매출 1000억원이 넘는 벤처기업도 470여개나 생겨났다.
벤처업계에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국가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해왔는데, 이름 자체를 뺏기니 존재가 배척당하는 기분”이라는 말이 나올법 하다.
결국, 중소벤처기업부의 명칭을 바꾸려는 시도는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행위다. 이 숲에는 ‘외래어 사용을 줄이자’는 나무도 있지만, 그동안 벤처기업이 쌓아온 성과, 벤처라는 단어 안에 담긴 혁신성, 반드시 인정받아야 할 다양한 초기기업의 형태 등 더 많은 수종이 자라고 있다.
대한민국의 새 경제 생태계를 단(單)수종으로 채울 것인가 다(多)수종으로 채울 것인가.
그 첫걸음에서부터 정치권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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