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의향서 2197명에 존엄사 7명
여성이 남성의 두배…70대가 최다
계획서 작성률 25%…“孝문화 때문”
2008년 2월, 평소 건강했던 김모(사망 당시 78세ㆍ여) 씨는 폐암 조직 검사를 위해 종합병원에 갔다가 검사 도중 의식을 잃었다. 결국 호흡이 사라진 김 씨에게 인공호흡기가 부착됐다.
한 달 뒤 병원은 뇌사를 언급했다. 그러나 김 씨의 자녀들은 2005년 아버지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당시 “호흡은 하나님의 것이지, 기계로 연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혹시 (나에게도)그런 일이 있으면 절대로 하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해 내고 연명 치료 중단을 요청했다. 하지만 병원은 거절했고, 소송이 시작됐다. 바로 그 유명한 ‘김 할머니 존엄사 소송’이다. 같은 해 11월 서울서부지법은 “병원 측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연명 의료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됐다. 김 씨는 대법원 판결 끝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지 201일 만인 2010년 1월 10일 숨을 거두었다.
김 씨의 존엄사 이후 죽음을 맞는 문화가 바뀌어 가고 있다. 병든채 목숨을 유지하는 ‘일 빙(ill-being)’ 대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웰 다잉(well-dying)’으로 죽음의 패러다임이 옮겨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연명 의료 결정 시범 사업 한 달 만에 무의미한 연명 의료 받기를 거부하고 합법적 존엄사를 선택한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성인으로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미리 써놓을 수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도 2000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합법적으로 존엄사를 선택한 사람도 7명이나 됐다. 그러나 실제 환자의 참여율이 저조해 이를 끌어올리는 것이 과제가 될 전망이다.
연명 의료 결정 시범 사업 한 달 만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이 2000명을 넘어섰다. 병든채 목숨을 유지하는 ‘일 빙(ill-being)’ 대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웰 다잉(well-dying)’이 죽음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한 병원의 입원실 모습. [헤럴드경제DB] |
▶일반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만 한 달간 2197명=30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10월 23일부터 이달 24일 오후 6시까지 한 달간 연명 의료 결정 시범 사업을 시행한 중간 결과, 시범사업 참여 10개 의료기관 입원 환자중 임종 과정에 접어들어 연명의료(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심폐소생술ㆍ인공호흡기ㆍ혈액 투석ㆍ항암제 투여 등 4가지 의료 행위)를 유보하거나 중단하고 숨진 환자가 모두 7명이나 됐다.
합법적 존엄사를 선택한 이들 사망자는 70대 남자 1명(패혈성 쇼크ㆍ다발성 장기 부전), 50대 남자 2명(말기 암), 40대 남자 1명(뇌출혈), 80대 여자 1명(다발성 장기 부전ㆍ호흡 부전), 또 다른 80대 여자 1명(만성 호흡 부전ㆍ신부전), 60대 여자 1명(다발성 골수종ㆍ폐렴) 등이다. 사망자 7명중 2명은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고, 4명은 환자 가족 2명의 진술로, 1명은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 의료를 중단했다.
19세 이상 성인이 나중에 질병으로 임종기에 접어들었을 때 연명의료 중단ㆍ유보 뜻을 미리 밝혀놓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례도 늘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ㆍ작성ㆍ등록 시범 사업 기관은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ㆍ각당복지재단ㆍ대한웰다잉협회ㆍ세브란스병원ㆍ충남대병원 등 5곳에 불과하다. 작성하려면 이들 기관을 직접 방문해야 한다. 그럼에도 시범 사업 한 달 만에 작성 건수는 2197건에 달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를 성별로 보면 여자가 1515명(69%)로 남자 682명(31%)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연령별로는 70대 748명으로 가장 많았고 ▷60대 570명▷50대 383명 ▷80대 247명 ▷40대 183명 ▷30대 33명 ▷20대 21명 ▷90대 12명 등이었다.
다만 실제 환자의 참여율은 아직 저조하다. 임종기에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환자는 11명에 그쳤다. 이들 11명은 모두 말기 환자(암 환자 10명ㆍ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자 1명)로, 성별로는 남자 7명, 여자 4명이었다. 연령별로는 ▷50대 6명 ▷60대 2명 ▷70대 2명 ▷80대 1명이었다.
특히 연명의료계획서를 쓰고자 상담받은 환자는 44명이었지만, 실제 작성한 경우는 11명이었다. 담당 의사가 환자 1명당 2~3회, 한 번에 30분~1시간 상담했는데도 25%만 작성했다. 환자나 가족이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에 신중을 기한다는 방증이다. 사망자 7명 중에서도 받고 있던 연명 의료를 중단한 환자는 1명이었다. 나머지 6명은 새로운 연명 의료를 받지 않는 유보 결정을 내렸다. 환자와 가족이 이미 부착한 인공호흡기 등을 떼는 것을 더 부담스러워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환자 참여 저조, 특유 孝 문화 때문일듯=이처럼 실제 환자의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나 연명 의료 중단 사례가 예상보다 활발하지 않은데 대해 환자에게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라는 사실을 알리기 어려운 의료 현장 분위기가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말기 환자에 연명 의료에 대한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고 환자의 보호자마저 ‘죽음이 임박했다’는 걸 알리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효(孝) 문화가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의료계에서는 보고 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 위원)는 “우리나라는 아픈 부모에게 연명 치료를 비롯해 모든 방법을 마지막까지 동원해야 ‘자식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며 “환자 참여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는데 그대로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환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절차적 문제도 연명 의료 중단을 원하는 사람과 실제 환자 참여의 간극을 벌이는 원인으로 지적됐다. 허 교수는 “죽음을 앞두고 심폐소생술 등을 거부하는 환자를 계산하면 하루 400~500명 정도가 ‘사실상 존엄사’를 택하고 있는데도 실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는 환자는 매우 적은 편”이라며 “반드시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서명을 받아야 하는 규칙이 실제 현장에서 지켜지기 어렵기 때문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처럼 의료진과 가족이 상의해 대리 결정 하는 방안의 확대를 고려해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반면 복지부는 가족의 대리결정 권한 확대를 논의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박미라 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환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무의미한 치료 대신 죽음에 대해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내년 1월 15일까지 시범 사업을 펼친 뒤 같은 해 2월 4일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을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시범 사업이 끝나는 내년 1월 15일부터 법시행일인 같은 해 2월 4일까지 한시적으로 연명의료계획서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없다.
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