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신년기획 2018-반쪽 지방분권…길을 찾다 ⑤스위스] 올림픽 추진도 주민투표가 먼저…스위스는 지방자치 모범
뉴스종합| 2018-01-05 12:00
2026년 동계올림픽 칸톤 유치 계획
2013년엔 지역민 반대 부딪혀 포기

반려견稅 놓고 격론·거수투표도
지자체 80% 주민총회 통해 결정

[베른ㆍ예겐스트로프(스위스)=최진성 기자] 스위스는 2026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발레 칸톤(주 개념의 광역자치단체) 주도인 ‘시옹’을 중심으로 베른, 보 등 인근 칸톤과 분산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주최는 스위스 정부가 아닌, 발레 칸톤과 인주 주의 연합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발달한 스위스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400여개의 스위스 지방자치단체들 중 약 80%는 주민총회를 통해 정책을 결정한다. 의회를 통과해도 ‘주민투표(혹은 국민투표)’를 거쳐야 실행될 수 있다.

시옹은 올해 상반기 주민총회를 열고 동계올림픽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올림픽 개최지를 선정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심사보다 훨씬 까다롭다. 손익을 직접 감당해야 하는 주민들의 현실적인 검증이 있기 때문이다. 시설투자 비용부터 경기장 활용까지 주민들이 직접 평가한다. 최근에는 ‘유럽 테러’ 이슈가 불거지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스위스는 지난 2013년 다보스가 있는 그라우뷘데 칸톤에 2022년 동계올림픽을 추진하다 지역 주민의 반대로 철회한 바 있다. ‘장밋빛 청사진’만 제시하고 유치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난해 11월24일 스위스 예겐스트로프 게마인데에서 열린 주민총회에서 유권자들이 손을 들어 찬성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최진성 기자/ipen@

지난해 11월24일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예겐스트로프 게마인데를 찾았다. ‘게마인데’는 칸톤 아래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기초자치단체 격이다. 이날은 주민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예겐스트로프는 2년마다 주민총회를 개최한다. 스위스 지자체는 1~2년마다 주민총회를 열고 주요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찬반 의사를 묻는다. 

한스 부르너 예겐스트로프 자치단체장은 “18세 이상 성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데 투표권이 있는 주민은 누구나 정책 입안부터 실행까지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다”면서 “연방정부든 칸톤이든, 게마인데든 모두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다”고 말했다.

이날 예겐스트로프 주민총회에는 총 5건의 안건이 올라왔다. ▷생활도로 상수도관 교체 ▷학교 멀티미디어 장비 교체 ▷2018년 예산안 승인 ▷차기 감사기관 선정 ▷지방의원 결산보고 등이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된 주민총회에는 예겐스트로프 유권자 4135명 중 231명이 참석했다. “참석률이 낮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전(前) 예겐스트로프 지자체장은 “이미 많은 부분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이슈가 아니면 투표율이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상규 전(前) 주스위스 한국대사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법ㆍ제도가) 탄탄하다보니 소소한 이슈에는 참여율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예겐스트로프 게마인데는 이날 주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두 달 전부터 각 가정에 우편물을 보내 안건을 안내하고 참석 여부를 독려했다. 부르너 자치단체장은 “우편물을 받는 순간부터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면서 “가족들이 토론하면서 찬반 여부를 결정하고 주민총회 당일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주민총회는 각 안건을 추진할 지방의원이 나와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아이디어도 반영된다. 질의응답이 끝나면 자치단체장이 찬반 의사를 묻고 주민들은 거수로 표시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산안 논쟁은 치열하다. 예겐스트로프 주민총회에서도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지역세금과 토지세, 마리당 연간 75CHF(스위스프랑)을 부과하는 반려견(동물)세 신설안 등을 확정하는데 ‘세금이 늘고 있다’는 측과 ‘세율을 더 높여야 한다’는 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주민투표로 원안이 가결됐다.

이날 주민총회를 참관한 라스 부스리히 군(15)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무엇을 결정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부모님과 함께 왔다”면서 “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30일 스위스 아펜첼 이너로덴 칸톤에서 열린 주민총회에서 유권자들이 손을 들어 찬성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제공=주스위스한국대사관]

칸톤 단위의 주민총회는 더 장관이다. 지난해 4월 아펜첼 이너로덴 칸톤에서 열린 주민총회에는 유권자 1만2000여명 중 4000여명이 참석했다. 당시 외빈으로 초청받은 이상규 전 대사는 “주 정부가 제안한 법안과 주민제안 법안 등 총 15개 의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찬반 거수투표가 이뤄졌다”면서 “주민투표에 따른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지만 주민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토록 함으로써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고취시키는 의미가 크다“고 소감을 전했다.

스위스는 칸톤에서 출발한 연방정부로 지방정부의 권한이 더 세다. 칸톤마다 연방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칸톤 자체 헌법을 만들고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별도로 존재한다. 연방헌법은 일명 ‘보조성의 원칙’에 충실한다. 중앙(연방)정부는 외교ㆍ국방, 통화, 통신, 에너지 정책 등 칸톤에서 할 수 없는 정책만 관할한다. 부르너 자치단체장은 “수백, 수천㎞ 떨어진 곳(중앙정부)에서 지역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면서 “지방자치는 국민을 만족시킨다”고 강조했다. 

ip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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