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국가지정기록물 ‘신문관판’ 3.1독립선언서는 가짜다
라이프| 2019-04-09 12:19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

박찬승 한양대 교수, 당시 신문·진술·활자 연구 주장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한 3·1운동의 시작을 알린 ‘독립선언서’는 두 가지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한 최남선의 출판사에서 만들었다는 이른바 ‘신문관판’ 독립선언서와 그 판형을 토대로 천도교 출판사 보성사에서 새로 찍었다는 ‘보성사판’ 독립선언서다. 실제로 이 두 선언서는 현재 모두 국가지정기록물이며, 서울시는 2016년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중 현재 ‘신문관판’으로 알려진 독립선언서가 1919년 3·1운동 당시 만들어진 선언서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 교양서 ‘1919’(다산초당)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확정된 것은 1919년 2월27일 저녁 7시쯤의 일로 그 전에는 33인의 이름이 들어간 선언서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 학계 일각에서는 신문관에서 활판을 넘겨주기 전에 찍은 이른바 ‘신문관판’선언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박 교수가 찾아낸 당시 관련자들의 신문조서와 진술에 따르면, 2월27일 최남선은 자신의 출판사인 신문관에서 활판을 짜서 최린의 집에 맡긴 뒤, 오후 5시 무렵에 보성사로 가서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그 활판을 가져다가 인쇄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종일은 공장감독인 김홍규에게 지시해 그 활판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그 활판은 위아래가 길어서 인쇄할 종이가 맞지 않아 김홍규를 시켜 위아래를 줄인 활판을 다시 짜도록 하고 그것으로 지형을 뜨고 연판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족대표의 성명과 가나다순에 문제가 있어 이를 수정해 두 번째 지형을 떴고, 그 뒤에 또 오세창이 전화로 민족대표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청해서 세 번째 지형을 만들었다.

최남선이 짜온 활판을 수정해 만든 첫 번째 지형과 두 번째 지형에선 민족대표 명단이 31인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수정해 만든 세 번째 명단에는 33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보성사판 이전에 33인이 들어간 신문관판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박 교수의 주장이다.
박 교수는 이와 함께 신문관판의 활자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띄어쓰기가 되어있고 현대 문법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령 보성사판에서는 ‘업도다’라고 한 것을 ‘없도다’, ‘업스니’라고 한 것을 ‘없으니’ 등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최남선이 그해 1월1일 ‘매일신보’에 쓴 ‘오도의 신세’라는 글에 ‘업슴’ 등의 표현을 쓴 것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난다.

박 교수는 신문관판은 최남선이 현대문법에 맞게 쓴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고, 아마도 해방 이후 누군가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 맞춤법에 맞춰 다시 조판해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현재 남아있는 ‘독립선언서’ 원본들의 33인의 서명자의 명단부분이 약간 위로 인쇄되거나 약간 아래로 인쇄된 것 등 지형이 다른 것과 관련, 박 교수는 본문 자판과 성명 부분 자판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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