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현장에서] ‘한풀이·분풀이’ 손해배상 소송
뉴스종합| 2019-06-11 11:28
만약 직업의 세계에 ‘프로 소송인’이 있다면 그가 해당될 것이다. 법원 복도 게시판에는 그날 재판이 열리는 사건 목록이 A4용지에 인쇄돼 붙는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한 사람이 대한민국과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낸 십여건의 행정소송이었다. 그날 오후 2시에 일괄 선고였다. 소송의 내용도 ‘부작위위법확인’으로 모두 같았다. 쉽게 말하자면 행정청이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게 위법함을 법원이 따져달란 것이다. 선고 결과를 들어보니 모두 ‘각하’였다. 소송의 요건 자체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행정소송뿐만 아니었다. 취재결과 A씨는 2018년 한해 동안 서울중앙지법 민사부에 700여건이 넘는 손해배상 소송을 접수했다. 대법관을 비롯한 판사들을 상대로 직무유기를 했으니 국가에 부당이득을 반환하고 자신에게도 5000만원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식이다.

소송도 ‘새끼’를 친다. 그의 행동패턴은 이렇다. 법원에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선 소송비용으로 일정 금액을 내야 한다. 예를 들어 피고에게 받아내려는 돈이 500만원인 경우에는 2만5000원이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을 내지 않는다. 대신 소송구조를 신청한다. 기초생활수급자 또는 돈이 없는 제소자 등 경제 취약계층을 위해 면제해주는 제도인데, 이를 악용하는 것이다.

법원은 돈이 없음이 인정되지 않거나 또 패소가 명백한 소송을 낼 경우 소송구조 신청을 기각한다. 그럼 그는 즉시 항고한다. 항고를 위해 또 소송구조를 신청한다. 이렇게 그가 낸 소송은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기약없이 돌고 돈다. 모두 합하면 최근 몇년간 A씨가 당사자로 이름을 올린 소송은 수천건에 이를 것이다.

문제는, A씨가 낸 수천건의 소송 때문에 진짜 다툼이 있고 잘잘못을 가릴 사건의 재판들이 지연된다는 것이다. 법원은 원칙상 접수되는 순으로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현재 법원에서 재판업무를 하는 법관수는 2632명에 불과하다. 반면, 한해 법원에 들어오는 사건 수는 2000만여건에 이른다.

그를 막을 순 없을까. 우리 헌법엔 재판청구권이 보장돼 있어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순 없다고 한다. 계속 소송을 당하는 피고는 고통을 받는다. 답변서를 내야되고,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변호사 선임도 해야한다. 실제로 A씨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각하 판결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법률상 받아들여질 수 없음이 명백한데 같은 내용의 청구를 거듭하는 것은 상대방(피고)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고, 사법 인력을 불필요하게 소모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는 소권의 남용에 해당하므로 부적법하다.”

승소가 목적이 아닌데 시간과 열정을 들여 소송을 내는 A씨를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손해배상 소송이 돈이 목적이 아닌 한풀이, 또는 분풀이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은 새삼 깨달았다.

최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건중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시민 4000여 명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상대로 국정농단 사건으로 입은 정신적 피해를 주장하며 낸 소송, 한 시민이 정호성 전 비서관을 상대로 “박 전 대통령 보좌를 못해 탄핵됐다”며 낸 소송이 대표적이다. 법원은 인과관계 없음을 이유로 기각했다. 어떤 손해를 입었는지 증명도 안됐고, 손해액을 산정하기도 어려우므로 아마 소송을 낸 당사자와 변호사도 승소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소송이 남발되는 것은 보여주기 또는 한풀이, 분풀이에 불과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th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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