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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사회 ②] ‘나’를 버리고 ‘물건’을 쌓는다…저장장애 ‘노란불’
뉴스종합| 2019-06-21 10:00
-이웃피해ㆍ청소비ㆍ상담 치료 등 사회적 비용 급증
-저장강박 가구 규모도 파악 안돼 체계적 접근 절실

송파구 오금동서 저장강박 가구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있는 모습. [송파구 제공]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 3년 만에 지방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 온 김○씨(58)는 다세대주택인 본인 소유 집에 들어섰다가 깜짝 놀랐다. 집 안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릇과 생활용품 등 이웃이 내다버린 폐기물이 집 안과 옥상에 가득했다. 옷가지에선 곰팡이가 피고 악취도 심했다. 아내는 쓰레기를 ‘보물’로 여겨 버리는 걸 고통스러워하는 등 저장강박 증세를 보였다. 디스크 등 건강 문제로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던 김 씨는 결국 동주민센터에 ‘SOS’를 쳤다. 복지담당 공무원 뿐 아니라 이웃 주민들까지 나서서 대청소를 하며 2.5톤 트럭 2대 분량의 쓰레기를 모두 치웠다.

최근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서 있었던 실제 사례다. 김씨의 사례는 스스로 도움을 요청한 경우지만 대부분의 저장강박 가구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는 자신의 생활을 부끄럽게 여겨 ‘커밍아웃’을 꺼린다. 오금 동주민센터도 김 씨의 아내를 설득하고 상담하기 까지 6개월이 걸렸다. 인구고령화 속에 1인 홀몸 어르신 가구가 늘면서 흔히 60대 이상에서 보이는 저장장애가 지역 사회에서 새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웃 주민에 대한 피해, 주거지 청소에 드는 비용과 인력, 정신과 상담과 치료 등 사회적 비용도 따라서 늘고 있지만, 관련한 통계와 연구는 미약해 지방자치단체의 체계적인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2015년6월1일~2016년7월31일 서울시 자치구별 저장강박가구 현황. [영등포구 제공]

21일 서울시와 자치구 등에 따르면 저장강박증과 관련한 피해 사례가 종종 터져나오지만, 저장장애 가구의 정확한 규모 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시 복지과가 2015년6월1일부터 2016년7월31일까지 25개 자치구 조사를 취합한 결과가 전부다. 당시 조사에선 시에서 모두 312가구가 있으며, 자치구별로는 영등포구가 40가구로 가장 많고, 금천ㆍ동작ㆍ성북ㆍ서대문ㆍ노원 등이 20가구가 넘었다. 하지만 저장강박 가구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 복지 대상자에서 누락되고, 주민이 신고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점 등 통계 조사에 사각지대가 있다. 실제 규모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자치구 복지담당들이 입을 모았다. 노원구 복지담당 관계자는 “저장강박 주민 중 집을 여러 채 보유하곤 여러 집에 쓰레기를 모으는 사람도 봤다”고 했다. 영등포구 관계자는 “(청소 필요성 등)설득까지 1년이 걸리기도 하고, 청소한 사실이 언론 등에 알려지면 그 가족들이 구청에 항의하는 등 공개가 쉽지 않다”고 했다.

노원구 하재홍 복지과 팀장이 작성한 2017년 시정연구논문 ‘잡동사니 저장 가구의 통합사례관리 개입 방향 고찰 연구’를 보면 시가 파악한 저장강박 가구 312가구 중 지자체 개입하지 않은 가구는 110가구에 이른다. 3분의 1 가량은 어떠한 서비스도 받기를 거부한 것이다.

312 가구 중 158가구(50.6%)가 주민 신고, 민원에 의해 발굴됐다. 복지 플래너 등 가정 방문에 의한 발굴이 126가구(40.3%), 경찰 신고 등 타 기관에 의한 발굴이 28가구다. 이 가운데 110가구는 환경정화 서비스를 받았고, 정신과 의뢰 25가구, 심리와 자활 치료 등 통합사례관리가 86가구에 이른다. 주거 유형을 보면 단독ㆍ다세대 주택이 85%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영등포구가 올해 작성한 저장강박가구 사례관리 매뉴얼을 보면 지난해 4월 기준 영등포구의 저장강박 가구는 모두 59가구이며, 이 중 65세 이상이 41가구로 전체의 69%를 차지했다. 노인가구가 대부분임이 확인됐다. 전체 가구 수도 시의 2016년 실태조사와 비교해 약 2년 만에 47.5%(19가구) 급증했다.

영등포구 조사에서도 가족, 이웃 등 주민 신고에 의한 발굴이 35%로 가장 많다. 이로 미뤄 “저장강박가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사회 문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이나 가족이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고 구는 해석했다.

저장장애 증세 진단표. [노원구 사례 발표]

사회적 비용도 덩달아 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주거환경 개선서비스에는 자활근로자, 지역주민조직, 동주민센터 직원 등 20~30명이 동원되는데, 거주지 면적과 쓰레기 규모에 따라 투입 인력은 달라진다. 송파구는 청소 업무를 사회적기업에 통째로 맡기고 있다. 폐기물 처리에 드는 비용도 쓰레기 량이 한번에 수톤에서 최대 수십톤까지 천차만별이고, 대개 구청 예산으로 처리돼 가늠하기 어렵다. 하재홍 팀장은 “공공기관에서 민원 해결 차원에서 당사자를 설득해 강제 청소를 시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현재로는 법적 근거나 절차가 마련되지 않았다”며 “청소 뒤 일어날지 모르는 재산 상의 손실, 자살 등 예상치 못한 책임으로 담당 공무원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시는 올해 처음으로 ‘사회적 고립가구 청소 및 정리지원 사업’ 예산 1억3500만원을 시민참여예산으로 편성했다. 성북ㆍ영등포ㆍ동작ㆍ관악ㆍ송파구 등 5개 자치구에 교부해 다음달 말부터 각 자치구가 실시한다.

/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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