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 중심·폐쇄적 클래식 음악계
안토니아 브리코 ‘여풍의 시작’ 알려
마린 올솝·시몬 영 등 리더십 가세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김은선 감독
보스턴심포니 첫 여성 지휘자 성시연
여자경·장한나 등 해외무대서 주목
여자경 지휘자와 코리안심포니. [프레스토아트 제공] |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96년 역사상 첫 음악감독이 된 김은선 지휘자.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제공] |
고작 30cm, 계단 한 칸의 높이다. 한 발만 디디면 오르는 포디엄(지휘대)은 여성들에겐 단단한 ‘유리천장’이었다. 1887년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메리 웜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처음으로 지휘한 이후 120여년간 수많은 여성들이 ‘금녀의 영역’을 도전했다. 이 곳에 선 많은 여성 지휘자는 클래식계의 역사와 전통을 깨는 존재다. ‘최초’, ‘처음’이라는 수사가 따라 다니고,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받았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같이 한다. 전문가들은 클래식계에 여성 지휘자들이 흔치 않은 이유로 남성 중심 문화를 꼽는다.
노승림 숙명여대 겸임교수는 “교향악계는 남성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여러 클래식 장르 중에서도 오케스트라는 금녀의 벽을 쉽사리 낮추지 않아 세계적으로 여성 지휘자의 배출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빈필, 베를린필과 같은 유럽의 오케스트라의 경우 특히나 남성 단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동용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기획실장은 “남성 위주의 음악세계가 주류로 형성되다 보니 남성들의 영향력이 강화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지휘자라는 리더의 역할이 여성들에겐 유리천장이었다. 여성들은 온전한 리더십과 음악성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프레스토 아트의 박태윤 대표 “무수한 편견과 차별,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여성 지휘자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지휘를 하려는 시도조차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 ‘시대의 벽’과 ‘금기’에 도전한 여성 지휘자들=오랜 세월 많은 여성 음악가들은 ‘금기’에 도전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더 컨덕터’의 주인공이기도 한 안토니아 브리코는 1930년대 여성 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에 ‘유리 포디엄’에 도전해 역사에 남는 성취를 거뒀다. 그는 베를린(1930)과 뉴욕(1938)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뉴욕필을 지휘한 여성은 브리코가 처음이다.
최근 20년 사이 클래식계에선 마린 올솝(64)과 시몬 영(59)이 지휘대 여풍의 주역으로 꼽힌다. 마린 올솝은 깨지지 않는 유리천장이라 여겨진 미국 메이저 교향악단 중 하나인 볼티모어(2007~)와 상파울루 심포니 오케스트라(2012~)를 지휘한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다.
시몬 영은 200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다. 2005~2015년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과 함부르크 주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었다.
지난한 세월을 거친 지금은 과거보단 더 많은 기회가 생겼다. 노 교수는 “과거에 비해 유리천장이 많이 사라졌다”며 “사회적 편견이 무너지고, 젠더 감수성이 발전하며 클래식 음악계도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이제는 여성에 대한 차별보다는 음악적으로 얼마나 뛰어나냐를 본다”고 했다.
▶여풍 거센 한국…마에스트라의 시대 열렸다=국내에선 남성보다 더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해외 무대에서 주목받으며 활약하고 있다. 이례적 현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96년 역사상 첫 음악감독 김은선(40), 126년 역사의 보스턴 심포니 사상 첫 여성 지휘자를 역임한 성시연(44)이 대표적이다.
김은선 지휘자는 유럽에서 활동, 백인 남성 위주의 클래식 무대에서 동양인이면서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썼다. 김 지휘자는 2008년 5월 지저스 로페즈 코보스 국제오페라지휘자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 같은 해 9월 스페인왕립극장 부지휘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3년엔 영국 국립오페라단(ENO)에 데뷔, 115년 전통의 ENO에서 지휘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성시연 지휘자는 2014년 국내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첫 여성 예술단장으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부임해 4년간 이끌었다. 성 지휘자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경기필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MBC ‘놀면 뭐하니?’에 출연, 클래식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에게도 이름을 알린 여자경(48) 지휘자는 일찌감치 ‘금녀의 벽’을 허문 주인공으로 꼽힌다. 여 지휘자는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오케스트라가 뽑은 지휘자상’만 무려 네 번을 수상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단원을 이끄는 것”(박태윤 프레스토 아트 대표)이 여 지휘자의 강점이다. 국내에선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 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첼로 신동’ 장한나(38)는 카타르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7년부터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 교수는 “국내에서 이른 시기에 여성 지휘자가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초 해외 선교사들이 근대화의 도구로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분이다”라며 “1920년대 이화여대 음악학부는 해외에서도 찾기 힘든 여성전문음악인 양성소였다. 근대적 교육 덕분에 한국 음악인들은 서양과 달리 음악 앞에서 남녀구별의 무의미를 일찌감치 깨달았다”고 말했다.
무대 밖의 빗장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포디엄 위에 오르면 지휘자는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전문가들은 “여성 지휘자들은 교감을 중시하고, 조화와 협력, 조용하고 부드러운 리더십를 발휘하는 것이 강점”이라며 “여전히 여성 지휘자의 비율은 적지만, 유리 포디엄이 깨지며 ‘마에스트라(Maestra)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박 실장은 “여성 지휘자는 아직도 자휘자가 아닌 ‘여성’ 지휘자로 부르지만 이제는 ‘여성’이 아닌 한 사람의 음악가, 지휘자로 대하고 바라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