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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익 뒷전, 여야 정쟁 한계치..“판을 바꿔야”
뉴스종합| 2022-11-11 10:52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텅 빈 야당 의원석을 지나 퇴장하고 있다.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는데 야당 의원들이 아예 본회의장에 참석을 하지 않은 것은 정부 인사가 국회에 예산안 설명을 하기 시작한 1988년 이후 처음이다. 이날 시정연설은 갈라진 정치권의 상징 장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연합]

[헤럴드경제=이승환 기자] “그간의 경험과 전문가들 의견을 종합해 내린 결론은 진영끼리 싸움질만 하는 양당 체제에서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다선 현역 의원)

“상대 당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가 아닌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현재의 정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당제로 가는 제도 개선이 시급합니다.”(재선 현역 의원)

“내년 초 선거법 개정이 이슈가 될 것인데, 정쟁이 아닌 정치 회복을 위해 비례대표를 대폭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초선 현역 의원)

현재 정국은 국익과 국민의 안전을 위해 ‘초당적 협력’이 필요한 사안이 넘친다. 물가와 금리, 환율이 동시에 상승하는 ‘3고(高) 현상으로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레고랜드·홍국생명 사태로 인해 자본시장의 유동성 위기감마저 고조되고 있다. 북한은 잇따라 미사일 도발을 강행하면서 한반도 안보 불안을 키우고 있다. 국가 애도기간이 끝난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책임 및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이 시급하다.

하지만 여야는 ‘진영 논리’를 앞세운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자본시장 경색을 두고 전 정부의 부채 증가를 원인으로 지목하는데 맞서 현 정부 경제부처의 부실 대응을 겨냥해 정치적 공세를 퍼붓고 있다. 야당은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여당을 배제하고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대장동 비리 의혹과 관련해 야당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에 특별검사 도입으로 맞불을 놓으며 법적 공방을 주고 받는 사이에 민생을 챙길 입법 과제는 뒷전으로 밀리는 중이다.

극으로 치닫는 여야의 정쟁에 국회에서는 ‘초유의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 진행된 국회 국정감사 기간(14일)동안 중단된 회의만 37번이다. 지난 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윤 대통령의 예산 시정연설은 헌성사상 처음으로 제1야당이 참석하지 않은 채 진행됐다. ‘반쪽 시정연설’로 문을 연 ‘예산 국회’가 난항을 겪으며 초유의 ‘준예산 사태’가 점쳐진다.

정치권에서는 최근 정국을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치를 통한 중재와 타협은 사라지고 정쟁과 법적 공방이 한계치에 달했다는 관측이다. 국회에서 정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치 복원’을 개인의 의지 또는 정당의 대승적 결단에만 기대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선거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1표 가치 다르고, 의석수 연결 안 되고= 현행 선거제도의 문제점은 기존 선거결과로 방증된다. 우선 현행 선거제도에서는 절반 가까이의 주권행사가 ‘의미 없는 일’이 되고 있다. 21대 총선에서 총 투표수 가운데 사표의 비율은 43.73%를 나타냈다. 20대 총선에서는 사표 비율이 50.32%에 달했다.

각 유권자가 행사하는 1표의 가치도 지역별, 선거구별로 다르다. 21대 총선 광주 북구을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형석 의원은 10만8229표를 얻어 당선된 반면 울산 동구에서 당시 미래통합당 권명호 의원은 3만3845표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더욱이 서울 용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강태웅 후보는 권명호 의원 득표수보다 2배 가까이 많은 6만3001표를 얻었지만 낙선했다.

아울러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율이 의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현행 선거제도에서는 표의 등가성(비례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 21대 총선 지역구 선거에서 민주당은 49.91%의 득표율로 163석을 확보했다. 이는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할 때의 136석보다 27석이 많은 결과다. 21대 총선의 경우 준연동형비례대표제로 인해 등장한 위성정당으로 거대 정당의 정당득표율과 비례대표 의석 수의 비례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해지기까지 했다.

20대 총선의 경우 민주당은 25.5%의 정당득표율로 전체 국회의원 의석 가운데 41%의 의석을 확보했고, 새누리당은 33%의 정당득표율로 40.6%의 의석을 차지했다. 반면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각각 26.7%, 7.2%의 정당득표율에도 실제 의식 비중은 12.6%, 2%에 불과했다. 결국 거대 양당은 투표 결과가 의석수로 과대 대표되고, 군소정당은 과소 대표된 셈이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행 선거제도 하에서는 표를 의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다는 문제점이 크다”며 “결국 표의 결과가 과대 대표되는 거대 양당제를 고착화시키는 제도”라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0월 26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열린 민생파탄·검찰독재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규탄대회에는 민주당 의원들과 당직자·당원 등 모두 1200여명이 참가했다. [연합]

▶다양한 사회 의제 반영 못하는 선거제도= 투표 결과가 왜곡되고 표의 등가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선거제도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의제가 제도권에서 논의되는 데 한계가 있다. 거대 양당은 진영논리와 지지층 이해관계를 대변하는데 주력하면 다음 선거에서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왔다. 양당의 관심을 받지 못한 의제들이 쌓일수록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해진다.

유엔 지속가능해법네트워크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올해 대한민국은 146개 국가 중 59위를 했다. 해당 보고서에서 행복도 순위 1위부터 10위 국가들의 선거제도를 살펴보면 순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가 1위부터 9위까지를 차지하고 있다. 10위인 뉴질랜드의 경우 혼합형(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지난 총선에서 준연동형선거제를 채택한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연동률 제한과 위성정당 등으로 사실상 정당득표율과 의석수가 연동되지 못한 혼합형(병립형)선거제도로 분류된다. 소선구제로 불리는 다수대표제 지역구 선거와 비례대표 선거가 각각 별개인 구조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지금 선거제도는 사실상 다수대표제인 소선구제도인데 이미 정치 실패가 확인되고 있는 제도”라며 “군소 정당이 등장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기후, 환경, 젠더, 기술, 지방 등 사회 다양한 의제들은 거대 양당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제도권에서 논의가 안 된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선거제도 개편 시동= 현재 정치권에서도 승자독식으로 기득권 양당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현행 선거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19일 김진표 국회의장과의 만찬에서 “승자독식 현행 선거제도도 문제가 많으니까 고쳐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과반의석을 보유한 더불어민주당은 8월 28일 전당대회에서 의결한 ‘국민통합 정치교체를 위한 결의안’을 통해 “현행 선거법을 개정하고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는 제도적 개혁을 내년 4월 중 마무리 짓겠다”고 약속했다.

선거제도 개편을 위한 신호탄은 이미 쏘아졌다. 2024년 4월 10일에 치러질 22대 총선 앞두고 국회의원석거구획정위원회(선거구획정위)가 공식 출범한 상태다. 선거구획정위는 현행법상(선거일 13개월 전) 내년 3월 10일까지 선거구획정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선거구획정안이 마련되려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에서 선거구별 인구 편차, 지역구 의원 수 등의 법적 기준을 먼저 확정해야 한다. 국회 안팎에서 선거제도 개편에 공감대가 높다고 해도, 정작 제도 개선의 키를 쥐고 있는 현역 국회의원들이 법 개정을 하지 않으면 선거제도 개편은 또다시 4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선거제도를 개선할 때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논의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며 "국민 여론상 의석수 자체를 늘리기는 힘들고, 논의 왜곡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연동제보다는 순수 비례대표제를 개선 방향으로 잡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nic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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