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일반
[영상] 전쟁의 시대 틈타 전 세계 뒤덮는 권위주의 먹구름 [글로벌플러스]
뉴스종합| 2022-11-14 21:01
[로이터·신화·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인류의 역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진보의 종착점에 도달했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미국과 소련 간에 벌여졌던 동서 냉전 종식기였던 1989년 ‘역사의 종언’이란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처럼 주장했다. 권위주의·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최종 승리하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결과라 여길 정도였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물줄기의 방향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란 두 ‘스트롱맨’이 각각 이끄는 중국과 러시아는 민주주의 진영의 대표격인 미국 등 서방을 ‘패권주의’라 비판,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민주주의 진영의 대척점을 이끄는 지도국임을 자처하고 있다. 진영 간 갈등에서 불거진 ‘신냉전(新冷戰)’은 권위주의 진영 내부의 단일대오를 더 공고히 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모양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강력한 권위주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장기 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다”며 “이제 그들은 야망을 실현하려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표되는 ‘열전(熱戰·무력을 사용하는 전쟁)’에 따른 안보 위기와 에너지 대란 등의 상황은 남미와 중동 산유국, 유럽과 아시아 등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적 기반을 더 굳히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권위주의 지도자 권력 강화 자양분 되는 전쟁

현재 세계 안보 지형에서 서구에 맞설 수 있는 두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의 두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 중이다.

지난달 3연임을 확정하며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던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 주석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만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미국과 정면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22일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폐막식에서 퇴장하면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짧게 말을 건네고 있는 모습. 후 전 주석이 퇴장하는 가운데 후 전 주석이 이끄는 계파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인사들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 [유튜브 'Guardian News' 채널 캡처]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공산당은 시 주석이 당대회에서 인민해방군에 ‘훈련과 전쟁 준비를 전면적으로 강화하라’로 요구한 이후 대만해협에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상시 전쟁 준비 태세’를 강조했다”고 평가했다. 내부 결속을 극대화하고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안보 환경에 대응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며 제3차 세계대전과 핵전쟁 위기를 불러온 푸틴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로 대표되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21세기 러시아를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침략 전쟁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서방 세계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불가피한 행동으로 미화, 러시아 내부 반체제 인사 탄압 속도를 높이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러시아 랴잔의 징집병 훈련소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모습. [유튜브 'CNN' 채널 캡처]

우크라이나 전쟁을 빌미로 권위주의 체제 강화를 노리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대륙을 가리지 않고 발견할 수 있다. ‘21세 술탄'으로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존재감을 과시, 내부 권력 강화에까지 활용 중이다. 지난 4월 총선에서 4연임에 성공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도 불안한 안보 환경을 핑계로 내부적 자유를 억압하며 권력을 강화 중이다.

에너지 대란도 권위주의 정권에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통한 ‘원유 감산’을 무기로 힘을 과시하고 있다. 여기에 남미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원유를 무기로 과거 서방이 부과했던 제재를 한꺼풀씩 벗겨내며 돈줄 틔우기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이 밖에도 서방과 중·러 등 강대국의 시선이 신냉전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미얀마와 태국 등의 군사 독재 정권은 잔인한 통치를 자행 중이다.

전 세계적 법치 후퇴 현상 뚜렷

세계 곳곳에서 권위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증거는 각종 연구 지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세계사법정의프로젝트(WJP)가 전 세계 140개국을 대상으로 올해 ‘법의 지배(법치) 지수’를 산출한 결과 61% 국가에서 전년 대비 점수가 하락했다는 결과가 도출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조사에선 기본권과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지수가 크게 떨어지면서 ‘권위주의’의 기운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됐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기본권 존중 지표는 2015년 이후 전체 국가 중 4분의 3이 감소했으며, 권력 기관 통제 부문의 지수 역시 3분의 2 국가에서 떨어졌다.

이 밖에도 표현의 자유 관련 지수는 조사 대상국 중 81%, 집회·결사의 자유 지수는 85% 국가에서 악화됐다.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핵심 요소인 권력기관 통제 지수도 절반이 넘는 58% 국가에서 후퇴한 것으로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앤더슨 WJP 사무총장은 “오늘날 지구촌에서 44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작년보다 법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체제가 약화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다.

문제는 이 같은 추세가 세계 유수의 싱크탱크가 실시한 연구 결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국제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운영하는 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 스웨덴 예테보리대학이 실시한 ‘민주주의 다양성’ 조사 등에서 대체로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권위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일관된 추이가 보고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꽃’ 선거, 권위주의 강화 수단으로 악용도

전문가들은 전쟁의 시대를 맞아 권위주의가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선거’를 통해 강화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문제로 지적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여자 무솔리니’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 수십년의 철권통치 끝에 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아버지의 자리를 36년 만에 되찾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 필리핀 대통령 등을 예로 들며 “2010년대 이후 전 세계 60%가 넘는 국가가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지만,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모이제스 나임 최고연구원은 이 같은 현상의 원인에 대해 “인기영합주의(populism), 양극화(polarization), 탈진실(post-truth) 등 ‘3P’가 전쟁 등으로 인한 안보 불안 속에 민주주의 시민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권위주의 세력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밖에도 미국 보수 논객인 팻 뷰캐넌은 美 싱크탱크 ‘아메리칸 아이디어스 인스티튜트’가 격월로 발행하는 잡지 ‘디 아메리칸 컨저버티브’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일명 ‘동맹국’으로 불리는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무관심한 미국의 태도가 권위주의 정권을 떠받치는 힘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내놓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패권 경쟁과 냉전·열전에서 승리하려는 미국이 앞으론 ‘민주주의 가치 동맹’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국 우선주의’를 이유로 권위주의 체제에까지 손을 내미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며 문제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realbighea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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