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우크라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 “매일 죽음을 경험…음악으로 멈추고 싶었다”[인터뷰]
라이프| 2023-09-15 13:34
우크라이나 출신 옥사나 리니우는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 극장 259년 역사상 최초의 음악 감독이자,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45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친구가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매일 매일 죽음을 경험했어요. 음악으로 그것을 멈추게 하고 싶었어요. 이제 (저에게) 음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문제가 됐어요.”

‘금녀의 벽’을 넘어선 ‘최초’, ‘처음’의 아이콘.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45)의 이름 앞엔 언제나 ‘여성 지휘자’로 거둔 눈 부신 ‘성취’가 줄줄이 나열됐다. 그러나 지난해 러시아가 그의 모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달라졌다. 옥사나 리니우의 행보가 누구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쟁의 반대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 국립예술단체 연습동에서 만난 리니우는 “전쟁이 나의 음악관에 당연히 큰 영향을 미쳤다”며 “지금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하는 것은 그 곡이 걸작이어서가 아니라 전쟁의 희생자들을 먼저 생각해서다”고 말했다.

리니우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9월 17일, 예술의전당)와의 연주를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이 공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밤의 기도’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선곡했다. ‘밤의 기도’는 우크라이나 작곡가 예브게니 오르킨이 작곡한 곡으로, 리니우와 우크라이나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지난 3월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했다.

리니우는 지난 2016년 13∼23세 단원들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그는 “전쟁 이전 이 오케스트라는 ‘음악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전쟁 이후 어린 단원들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지원하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목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음악가를 꿈꾸며 리니우를 찾아온 단원들은 여전히 전쟁의 한복판에 놓여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집을 잃은, 가슴 아픈 현재를 목도한 단원도 적지 않다. 전쟁은 이들에게서 미래를 꿈꾸며 지내온 평화로운 날들을 앗아갔다. 현재 이 오케스트라는 비극의 한복판을 떠나 유럽 각지를 떠돌며 공연하고 있다. 전쟁이 이어지는 조국이 아닌, 보다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투어 일정으로 독일에서 2주간 지낼 때, 14살의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에게 독일에 와서 뭐가 좋으냐고 물으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다고 답했어요. 이 친구는 키이우에서 왔는데 최근 일주일 간 공습이 없던 날이 하루도 없었대요. 방공호에 숨어 두려워하지 않고 친구들과 연주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우크라이나 출신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전쟁의 비극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리니우에게도 닥쳐왔다. 그는 “나 역시 전쟁이 나고 한 번도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지 못했다”며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 우실 때가 많다. 끔찍하고 슬픈 상황이다. 위험이 도처에 있다”고 말했다.

리니우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최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전쟁 중 살해 당한 우크라이나 시인이 쓴 시를 가사로 한 칸타타를 우크라이나 합창단과 공연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이라며 “예술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세계에서 당장 일어나고 일들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리니우와 같은 행보를 보이는 인사들이 많아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에선 보다 적극적이다. 러시아 출신의 연주자들은 물론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의 곡을 연주해서는 안된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리니우는 그러나 “러시아의 음악을 금지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은 한 나라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공유하는 인류의 유산”이라며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음악을 금지하자 라벨은 반대 입장을 냈다. 라흐마니노프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의 이 전쟁을 분명 반대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150년 전 죽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지금을 기준으로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단단한 음악관으로 자신만의 길을 열고 있는 리니우는 한국의 김은선, 성시연과 함께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여성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그의 이름 앞엔 ‘역사상 처음’이라는 수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 극장에선 259년 역사상 최초의 음악 감독이었고,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선 145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였다.

리니우는 여성 지휘자를 지원하기 위해 부지휘자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지금은 여성 지휘자들이 제법 보이지만, 내가 학생이었을 때 여자는 나 혼자 뿐”이라며 “최근엔 국제 무대에서 성공한 여성 지휘자들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정밀한 연주로 평가받는 리니우는 이탈리아 베르디 페스티벌, 캐나다, 일본, 메트로폴리탄 데뷔 등 상당량의 일정이 빼곡하게 예정돼있다.

“예술엔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힘과 정신적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어요. 전 새로운 작품을 대할 때마다, 이 작곡가는 왜 이 작품을 썼는지 생각해요. 과거의 걸작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의도를 생각하며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거죠. 지금 제겐 여러 데뷔 무대를 잘 해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예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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