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일반
아프리카서 가스 캐는 유럽...에너지 전쟁 ‘뜻밖의’ 승자들 [글로벌 E지도가 바뀐다]
뉴스종합| 2023-10-03 07:00
알제리의 크레치바 가스처리시설의 모습 [로이터]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가 세계 에너지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유례없는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 유럽이 대체 공급처 찾기에 나서면서다. 그동안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변두리’ 국가로 취급 받던 알제리·아제르바이잔·콩고 등이 신흥 자원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이같은 제3의 자원강국들을 “세계 에너지 전쟁의 뜻밖의 승자들”이라고 표현했다. 로이터 역시 “아프리카가 유럽의 천연가스 사냥터로 변신했다”고 전했다

(천연가스 수출 확대에 가장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 나라는 알제리다. 사하라 사막 가운데 위치한 알제리의 비르 레바 지역에서는 이탈리아 에너지기업 ‘에니(Eni)’와 알제리 국영 석유·가스기업 소나트랙이 신규 천연가스정 수십 곳을 시추 중이다.)

알제리는 한때 이탈리아의 최대 천연가스 공급국이었으나, 저렴한 가스를 앞세운 러시아의 공세에 밀려 지난 10년간 사실상 유럽시장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유럽 천연가스 수요의 45%를 차지했던 러시아산 가스의 공급이 막히자 알제리는 곧장 대유럽 가스 수출에 속도를 올리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알제리에서 생산된 가스는 지중해 아래 세개의 파이프라인을 따라 유럽으로 공급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알제리산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거의 대체한 상황이다. 알제리는 당장 올해 유럽연합(EU)이 지난 2021년까지 러시아로부터 수입했던 천연가스의 65% 규모를 유럽으로 보낼 계획이다. 이어 이탈리아 정부가 북부 지역에 건설하고 있는 새 파이프라인을 따라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으로 이어지는 유럽 전반으로 공급망을 확대한다는 게 알제리의 다음 목표다.

이 같은 알제리의 야망은 전통적 동맹국인 러시아와의 관계마저 뒤흔드는 분위기다. 모하메드 아르캅 알제리 에너지부장관은 “우리는 (러시아와) 우정을 나누고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지만 사업은 사업”이라며 선을 그었다.

콩고 공화국에서는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기업 ‘에니’가 콩고 정부와 손잡고 50억달러 규모의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콩고 연안에 부유식 액화천연가스설비를 인수한 에니는 올해 하반기 설비 가동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이 곳에서 생산된 LNG는 콩고의 전력 수요 충족을 위해 내수 및 해외 시장에 모두 공급될 예정이다. 브루노 장-리샤르 이투아 콩고 원유부 장관은 지난 4월 취임식에서 “콩고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석유와 가스 생산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러시아 북극 야말반도에 위치한 러시아 반(半)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 소유의 가스정 [로이터]

지난 2018년 9월 마지막 수입을 끝으로 천연가스 자급자족국이 된 이집트도 천연가스 수출 강국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집트 역시 EU와 천연가스 수출 협약을 체결한 상태다.

여기에 캅카스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 역시 유럽으로의 천연가스 공급량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앞서 아제르바이잔은 지난해 7월 EU집행위원회와 오는 2027년까지 EU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량을 두 배 이상 늘린다는 내용의 양해각서에 서명한 바 있다.

아제르바이잔산 천연가스는 3379㎞의 파이프라인을 따라 ‘힐 오브 이탈리아(Heel of Italy)’라 불리는 ‘풀리아 지역’으로 흘러가 유럽으로 공급된다. 현재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영국 에너지기업 BP사가 꾸린 컨소시엄이 카스피해에서 가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샤 데니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유럽 일각에서는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등에 대한 천연가스 의존도가 지나치게 증가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국가들 역시 러시아처럼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영향력을 악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싱골라니 전 이탈리아 환경장관은 “가능한 한 많은 공급자를 확보해야한다”면서 “그래야만 지정학적 싸움에서 누군가가 가스를 지렛대로 사용할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에니의 주유소.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기업인 에니는 최근 공격적인 아프리카 천연가스 생산 투자에 나서고 있다. [로이터]

더군다나 알제리의 경우 러시아와 여전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알제리산 천연가스 판매 수익이 대거 러시아로 흘러들어갈 것이란 우려도 만만치 않다. 알제리는 세계에서 러시아산 군사 장비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국가 중 하나다.

제 3의 자원강국들의 열악한 인프라와 불안한 내정 상황도 풀어야할 숙제로 꼽힌다. 실제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기존 지중해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천연가스를 수출할 수 있지만, 물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파이프라인 건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더불어 전문가들은 아프리카 천연가스 수출국들이 대부분 자국 내 전력 공급이 부족한 상태로, 천연가스 공급 추가 협상에 소극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아프리카와 천연가스 공급에 대한 재협상이 이뤄질 수는 있지만, 이집트와 알제리 같은 국가들은 수출보다 내수 증가를 우선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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