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식은 도급, 실질은 파견”
2015년 해고 이후 9년만 최종 승소
관련 형사·행정재판도 근로자성 인정 취지
대법원[연합] |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대법원이 일본의 다국적 기업 아사히글라스에게 국내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해고된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아사히글라스가 실질적 사용자라고 판단했다. 관련 민사·형사·행정 소송 재판 하급심에서 엇갈린 판결이 나와 논란이 됐으나, 대법원은 나머지 재판에 대해서도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취지로 정리해 판결했다.
아사히글라스 한국은 디스플레이용 유리 제조·가공·판매 회사다. 2009년 TFT-LCD용 글라스 기판 제조 구미 공장에서 일할 근로자를 구하기 위해 협력업체 A사와 도급계약을 체결했다. 아사히글라스는 2015년 6월 사업규모 축소 등을 이유로 A사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A사는 같은해 8월 소속 근로자들에게 해고를 통보하고 10월 폐업했다.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11일 협력업체 A사 소속 해고 근로자들이 에이지씨화인테크노 한국(아사히글라스 한국법인)을 상대로 직접 고용 의사를 표시하라는 취지로 제기한 소송에서 근로자 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근로자들은 실질적으로 아사히글라스의 지휘·명령을 받아 업무를 수행한 파견 근로자였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도급이 아닌 파견근로였다면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에 따라 아사히글라스가 이들을 직접 고용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근로자들은 ‘직접 생산 공정’에 투입돼 근무했기 때문에 파견 사업이 아닌 직접 고용 대상이라는 점도 주장했다. 직접 생산 공정은 파견근로자 투입은 불가능하고, 직접 고용 근로자만 작업 가능하다. 아사히글라스측은 직접 지휘·명령을 한 사실이 없으며 생산 공정 중 일부를 특정해 A사와 도급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근로자 파견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원고용주가 근로자에게 제3자를 위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경우 근로자 파견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명칭이나 형식이 아니라 근로관계의 실질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며 “계약은 외형상 사내도급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근로자 파견의 역무를 제공받았다”라고 했다.
▷제3자의 업무수행 지시 ▷제3자 소속 근로자와 작업집단 구성 ▷실질적 편입 정도 ▷원고용주의 근로자 선발·교육·훈련·작업시간 등 결정 권한 ▷업무 수행의 한정성 등을 고려한 판단이다. 2심 재판부 또한 “아사히 글라스가 원고들에게 고용의사를 표시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A사 근로자들은 아사히글라스의 글라스 기판 제조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근로자들은 아사히글라스의 업무상 지시에 구속되어 그대로 업무를 수행했다. A사는 아사히글라스가 결정한 인원 배치 계획에 따라 근로자를 채용해 배치했고, 작업·휴게시간과 휴가 등은 아사히글라스의 생산 계획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또 “A사는 설립 이후 아사히글라스로부터 도급받은 업무만을 수행했고, 계약이 해지되자 폐업해 생산 업무에 필요한 시설과 설비를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고도 지적했다.
아사히글라스의 파견법 위반 형사재판, A사 근로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 등의 대법원 판결도 이날 함께 나왔다. 먼저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아사히글라스와 A사의 파견법 위반 상고심에서 양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을 파기환송했다.
검찰은 A사가 고용노동부 장관 허가를 받지 않고 2009년 4월부터 2015년 6월까지 근로자 파견 금지 업무에 근로자를 파견했다며 기소했다. 파견법은 직접생산공정에는 파견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출산·질병·부상 등 결원이 생긴 경우 등 필요가 있는 경우에만 일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1심 재판부는 파견법 위반을 유죄로 인정해 아사히글라스와 A사에게 각각 벌금 1500만원과 300만원을 선고했다. A사의 대표이사에게는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근로자 파견 관계가 없다는 취지로 양사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근로자 파견관계를 긍정하는 취지로 2심을 파기환송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또 아사히글라스가 제기한 행정소송에서도 아사히글라스가 사용자라고 판단했다. 다만 행정소송 자체는 아사히글라스가 승소했다. 해고 근로자들과 노동조합은 “아사히글라스가 A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근로자들을 해고하게 한 것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며 구제신청을 내렸다. 중앙노동위원회가 이를 인정해 구제 명령을 내리자 아사히글라스가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아사히글라스는 사용자가 아니다. 사용자에 해당한다 해도 A사와 도급계약 해지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어 부당노동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아사히글라스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 또한 1심 판단을 인용해 항소 기각했다.
대법원 또한 아사히글라스의 손을 들어줬다. 도급 계약 해지를 부당노동행위로 볼 수는 없다는 취지다. 다만 “아사히글라스가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 주체로 사용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park.jiye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