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베이스 연광철 “길고 지루한 바그너, 여섯시 퇴근 한국인에 맞지 않아”
라이프| 2024-07-12 14:53

베이스 연광철 [예술의전당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익숙하지 않은 곡들이 많이 있어요. 아마 지루할 거예요. (웃음)”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바그너 가수 베이스 연광철(59)의 당부가 의미심장하다. 공연을 앞둔 ‘보컬 마스터 시리즈’(7월 26일, 예술의전당)에서 들려줄 바그너 아리아를 설명하면서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우리가 바그너를 들을 때 꼭 한 번씩은 들어봐야 하는 곡”이라고 했다.

연광철은 이번 리사이틀에서 그의 30년 음악인생을 관통하는 음악들을 풀어낸다. 모차르트부터 바그너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이다. 베이스 아리아로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정점에 자리한 곡들이다. 공연에서 선보일 곡은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속 아리아를 시작으로 베르디 아리아 ‘돈 카를로’ 중 ‘그녀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바그너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줄 ‘파르지팔’ 중 ‘티투렐, 신앙심 깊은 영웅’ 등이 이어 나온다. 이중 ‘파르지팔’은 2013년 연광철이 한국에서 선보였으나 이후 다시 무대에 오른 적이 없는 곡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선 독일 오페라보단 불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을 더 많이 표현하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독일 오페라의 상징인 바그너 작품 때문에 그렇다. 바그너는 “서술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풀어가 많은 주제들을 다루는 작품이라 상당히 길고, ‘투란도트’의 ‘네순 도르마’처럼 딱 꽃히는 선율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광철은 바삐 돌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엔 바그너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유럽이 사랑하는 한국인 베이스 연광철의 주무기(?)인 바그너 오페라를 많이 볼 수 없었던 이유다.

“사실 우리나라는 바그너의 긴 오페라를 즐기고 감상할 여유가 많이 없어요. 독일은 보통 오후 3~4시면 퇴근을 하니 여유를 가지고 쉬다가 오후 6시경 4시간 짜리 오페라를 보러 갈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6시에 퇴근해 7시 30분부터 오페라를 보게 되면 무척 힘들어요. 사회적 여건이 개개인의 여유와 시간을 보장하지 않아요. 그러니 바그너가 한국 사회에서 인기를 끌려면 더 오래 걸릴 거예요.”

베이스 연광철 [예술의전당 제공]

연광철의 이번 공연이 더 특별한 것은 데뷔 30주년을 맞는 연광철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만날 수 있어서다. 그는 “이 곡들은 오페라 가수로서의 제 커리어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외국의 무대에서 어떤 역할로 부름을 받고 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한국 관객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했다.

연광철은 ‘원조 K-클래식 스타’다.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이듬해 독일 주요 극장(1993~94 시즌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 오페라 극장, 1994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솔리스트 자리에 올랐다. 199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단역 야경꾼)로 데뷔한 이후, 이 무대에만 150회 이상 섰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독일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엔 내가 바그너 가수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독일 관객 앞에서 독일 오페라를 하기 위해선 완벽한 사투리 표현 등 언어 구사 능력이 있어야 하죠. 처음 극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때도 (독일인에게도 외국어인) 이탈리아 오페라부터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주 작은 역부터 맡아오다 조금씩 큰 역할을 하게 됐어요.”

2002년 오페라 ‘탄호이저’의 그가 독일 영주로 출연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크리스티안 틸레만(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상임 지휘자 내정)의 파격 캐스팅이었다. 연광철은 “‘춘향전’의 변사또 역할에 외국인이 캐스팅된 것과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이 무대를 계기로 연광철의 음악 커리어는 한 단계 도약했다.

한 눈에 봐도 너무 다른 외모의 동양인 남성이 독일인보다 더 정교한 발음과 뉘앙스의 표현, 문화와 정서를 전달하자 까다로운 독일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2018년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궁정가수’ 칭호도 받았다.

베이스 연광철 [예술의전당 제공]

이번 공연과 함께 연광철은 자신이 직접 선발한 차세대 성악가들을 대상으로 교육 워크숍도 진행한다. 연광철은 “요즘 차세대 성악가들은 몸은 이탈리아, 독일, 미국에 있어도 한국인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며 “한 나라의 오페라는 그들의 언어로 그들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일이기에 종교, 건축, 회화 등 모든 문화와 역사 속에 더 깊이 들어가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이런 오랜 삶을 보내며 현재에 도달했다. 연광철이 거쳐온 시간엔 끊임없는 노력의 세월이 쌓였다. 독일어권 전역의 사투리를 녹음해 각 지역마다 언어 차이를 익혔고, 발음마다 울림의 위치, 자음의 활용 방법을 연구하며 독일어를 체화했다. 그는 “독일어를 하나도 모른 채로 가서 시작했기에 그들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더 잘 흉내내려 했던 노력의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 그는 “30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고,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딜 가나 ‘막내’ 베이스였던 그는 어느덧 선배가 되고, 가장 나이 많은 가수 중 한 명이 됐으며, 자신보다 경험이 적은 지휘자들과 작품을 하게 됐다. 연광철은 “30년은 지나온 시간이 아닌 여전히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시간”이라고 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고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음악이 좋았고, 왜 이런 작곡을 했는지 궁금했어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30년 전 출발해 지금도 가고 있는 중이에요. 전 하나의 물건으로서 저를 사주는 사람에게 가는 거죠. 제 음성으로 제게 주어진 역할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이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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