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TV, 공분을 말하다-2] ‘그것이 알고 싶다’ ‘송곳’…왜, 지금 ‘공분’을 다뤘나?
엔터테인먼트| 2015-11-11 10:23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러시아 시인 니콜라스 네크라소프가 했던 이 말은 유시민 전 장관이 자신의 저서 ‘청춘의 독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콘서트에서, 또한 1985년 서울대 프락치 폭력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던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인용했다. 유 전 장관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이라고 이 시구를 설명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노 중이다. 반복되는 국가적 재난을 겪으며 위기 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를 목격했다. 예기치 못한 재난상황을 관리할 국가 시스템의 부재를 절감하자 국민들의 자괴와 분노는 공포와 불안과 만나 사회 전체를 휘감았다.

젊은 세대 사이에선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 때는 ‘신인류’로 규정되며 X세대, Y세대로 불리던 이들은 이제 N포세대로 규정된다. 취업, 연애, 결혼은 물론이거니와 부족한 기회마저 사라진 불평등 사회를 산다. 희망이 거세된 지옥 같다는 자조가 나온다. 


TV는 그들의 자화상이 됐다. 거악이 드리운 여말선초를 끌어와 국가의 존재이유(SBS ‘육룡이 나르샤’)를 묻고, 임금체불ㆍ부당해고 등 노사문제(JTBC ‘송곳’)를 정면으로 조준한다. 지켜지지 않는 상식을 끈질기게 추적해 고발(그것이 알고 싶다)한다. 이 콘텐츠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해 ‘공분’을 건드린다. 


▶ TV로 들어온 ‘불편한’ 이야기…왜 만들었나=한 지상파 방송사의 간부급 관계자는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한 사회에서 똑같은 하나의 인간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상식의 기반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허탈과 분노의 감정을 반복하게 된다. 비록 아프고 어둡지만 TV에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말했다.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1992년 첫 방송됐다. 방송사 최초의 ‘미스터리 다큐’로 출발해 진화를 거듭했다. 제작진은 집요한 취재로 지난 수십년간 사회 전반의 구조적 부조리를 파헤쳤다.


제작진이 지키는 가치는 한 가지다. 그들이 해야할 역할을 중심가치로 두고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당연히 지켜져야 할 일들이 지켜지지 않는 세상을 바로잡는 것을 제작진의 몫”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켜지지 않는 것’을 꼬집어 바로 잡고, ‘진실’에 다가서자 프로그램은 파괴력을 발휘한다.

두 편의 드라마 역시 시대를 달리해 이 사회의 불편한 현실을 건드린다.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을 영상으로 옮긴 JTBC ‘송곳’은 국내 드라마 최초로 노사문제와 노동운동 과정을 파고들었다. 네이버 평점 9.96을 받은 원작의 인기에 힘 입어 드라마도 매회 화제다.

‘송곳’을 연출하는 김석윤 PD는 드라마를 기획할 당시 “‘괜찮겠냐’는 우려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콘텐츠라는 상품은 팩트도 중요하지만 즐길 수 있어야 하지만, 시청자가 보기에 불편하지 않겠냐는 우려”였다. 


‘송곳’은 2003년 외국계 대형마트 까르푸 노조의 조직 과정과 파업현장의 이야기를 ‘푸르미 마트’라는 공간으로 옮겨 담았다. 김석윤 PD는 “이 이야기를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유에 의문이 들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노사문제를 넘어 서민들의 부당한 삶의 모습이 담겼다”며 “노조를 편드는 드라마도, 사측이 불편해할 드라마도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말하는 이야기라는 판단으로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제작비 300억원을 투입한 대작이다. 히트 사극(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을 집필한 작가(김영현-박상연)의 복귀, 신구세대를 아우르는 스타 배우(김명민 유아인 신세경 변요한 천호진 윤균상)들이 만나 ‘사극판 어벤저스’로 불렸다.


드라마는 2011년 ‘뿌리깊은 나무’ 집필 당시 두 작가의 머릿 속에서 자란 아이디어에서 출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기 위해 기획됐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드라마는 기존 사극에서 수차례 다뤄진 여말선초를 다시 한 번 소환했다.

작가들이 찾은 해답은 ‘나라 국(國)’자에 있다. “국민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이나 고려 말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국민을 전혀 지켜주지 못한 시기”(박상연 작가)였기에 드라마는 고려 말 수탈의 역사를 견디다 죽어나가는 백성의 참상을 그린다. “국가가 존재이유를 잃었을 때 개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김영현, 박상연 작가) 그 존재 이유를 역사 속에서 포착하고, “여말의 부패한 사회상을 차용해 2015년 대한민국의 경제 양극화 상황을 보여주며 변혁에 대한 열망”(윤석진 교수)을 드러낸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는 이 시대야말로 “왕권교체기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기 좋은 시기”라고 봤다. 



▶ 카타르시스 안긴 TV…“건전한 분노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드라마와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장르의 특성이 달라 콘텐츠의 영향력이 다르다.

시사고발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정직하게 끌고 가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기업을 고발하면 불매운동이 일고, 미제사건에 다가서면 재수사가 진행된다.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경찰보다 나은 방송’이라고 부른다.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프로그램에서 방영하는 내용을 더 신뢰하는”(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 현상이 빚어진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성장시킨 힘은 시대적 ‘공분’이었다. 진행을 맡은 김상중은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질타하고, 함께 공분을 사준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건전한 분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제작진의 생각이다.

드라마는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드라마라는 장르는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을 담아내는 고발자이자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통해 해결책까지 제시”(윤석진 교수)하는 것이 특징이다. 문제제기에만 그칠 경우 시청자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현실이 반영돼 시청자의 공감과 대리만족”(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을 끌어낸다.

드라마는 장르의 특성으로 인해 “현대극이든 시대극이든 현실을 환기시키면서도 현실에선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안도감”을 준다. 때문에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 한계 또한 분명히 있다”(윤석진 교수)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현실을 담은 드라마 역시 콘텐츠로의 가치가 충분하다. “누군가는 불편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현실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는”(김석윤 PD) 이 드라마들이 “현실에의 안주가 아니라 (사회를) 움직여보자는 의미에서 공적인 부분에 이바지하는 측면”(안내상)이 있기 때문이다. ‘송곳’에 출연 중인 배우 안내상은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이런 드라마들이 한 번쯤 더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드라마들이 조금은 나아지는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단초”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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