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의 기획과 스토리텔링에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다. 보통 한 두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그들의 갈등과 대립, 화해를 다루던 전통적인 구성을 벗어나 4~5명 이상의 주연급 배우들을 캐스팅해 보다 많은 이야기를 보여주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보통 ‘멀티 플롯’이나 ‘다층적 서사구조’라고 불리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크게 보면 10명 이상의 남녀가 주인공이 돼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비슷한 비중으로 교차시켰던 외화 ‘러브 액츄얼리’식 구성과 할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톱스타들을 대거 기용해 일종의 ‘드림팀’의 활약을 보여준 ‘오션스 일레븐’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최근 두 달 가까이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경우엔 두 커플, 네 남녀의 이야기를 한 작품에 담았다. 이순재-윤소정의 애틋한 연애담과 송재호-김수미가 보여주는 노부부이야기가 동시에 진행이 된다. 오는 14일 개봉하는 ‘수상한 고객들’의 경우엔 보험판매원(류승범)이 주인공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그가 만나는 고객 4명의 사연이다. 사기를 당해 사업을 망한 기러기 아빠와 가수 지망생인 소녀가장, 틱장애로 인해 취업을 못하고 노숙자로 지내는 청년, 자식 넷을 키우며 가난에 시달리는 여인의 사연이 차례로 전개된다.
‘더 많은 주인공, 더 많은 이야기’를 내세운 이러한 작품들은 상업적으로는 한 두명의 톱스타에 대한 의존도를 벗어나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최근 국내 극장가는 스타감독의 유명세나 한 두명의 톱스타에 의존한 기획이 줄줄이 실패했다. 감독, 배우의 이름이 흥행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다는 말이다. 일련의 설문조사나 영화관객 조사에 따르면 국내 영화관객들은 출연 배우보다는 줄거리나 장르를 보고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평범한 인물, 작은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이러한 추세에 한 몫했다. 이미 인터넷 블로그나 트위터에는 보통 사람들의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들이 넘쳐나고 때론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주인공 한 두명을 빛내고 살리기 위해 여러 희생자를 만드는 것 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그리는 스토리가 점차 인기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야기의 민주주의’가 아닐까.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