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소 후 경찰에 신장 기증한 소매치기범 기억나”
박 본부장은 신장이식 문제가 없었냐는 질문에 “사람의 신장이 두개가 있는 이유를 아는가. 하나는 떼서 남주라는 거다”라며 웃었다. 박 본부장에 따르면 인간의 신장은 둘 중에 하나가 없어도 두개가 있는 것과 똑같이 기능한다. 그는 “독일에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들 중에서 빈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좀더 많이 발견된 연구결과가 나왔다. 살아서 장기를 떼주는 것도 그 정도라고 보면 된다”라고 덧붙였다.
박 본부장은 지난 1991년 1월20일 본부를 설립, 나흘 후인 24일 신장을 기증했다. 장기기증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본인이 가장 먼저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그는 장기이식 1호일 뿐 아니라 공식적인 헌혈 1호다. 아주대병원서 목사로 있으면서 우연히 22살 젊은이에게게 헌혈을 한 것이 헌혈 운동의 계기가 됐다. 1968년부터 열정적으로 한 헌혈 운동 덕에 1985년에는 피를 파는 매혈이 헌혈로 완전히 대체됐다. 그는 “당시 서울시내 빈공간은 우리가 다 매꾼다는 마음으로 헌혈의 집을 만들었다. 광화문 지하도에 있는 첫 헌혈의 집도 그렇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헌혈의 경우 가족끼리 나들이가서 혹은 데이트를 하면서도 하는 이들이 생길 정도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지만 장기이식서약에 도장을 찍는건 아직까지 사람들에겐 헌혈만큼 결정이 쉽지 않다. 일부 사람들에겐 아직도 장기이식을 떠올리면 안구를 꺼내고 메스를 대 신장을 꺼내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박 본부장은 “땅에 묻혀 점점 썩어가는 자신의 시신은 어떤가. 화장할 때 불에 옹그라드는 시신은? 죽음 후의 일이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남에게 제 살을 떼 주는 이식자들이 모두 뉴스가 되겠지만 박 본부장의 기억속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감옥에서 바로 나와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소매치기 17범이 교도소에서 나와 경찰에게 신장을 기증한 일, 청송감호소에서 9년을 지낸 전과자가 기증 후 마취서 깨자마자 “이제 사람 구실 했네”라고 했다가 이를 TV로 본 과부와 결혼한 일 등이다. 그는 “그분들은 죄를 씻는 기분으로 장기기증을 한 것 같다. 보람도 느꼈고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더라”라고 말했다.
박 본부장은 장기기증자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비판하며 말을 끝맺음했다. 그는 “세계 어떤 나라도 기증자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기증자를 영웅시하며 기념하고 그 뜻을 기려야 한다. 헌혈을 하고 나서 영화티켓 주는 것도 문제 삼을 거다. 물질적 보상이 따르면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병국 기자/cook@heraldcorp.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