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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한글은 역사에 대한 도전이었다
라이프| 2011-10-07 10:23
음운학·형태학·발생학 통해

일본인 한글 우수성 분석


일반 백성에 훈민정음 반포

한자권에 대한 문화적 혁명


최만리 둘러싼 담론 핵심은

知의 지평서 벌어진 사상투쟁







“한글의 탄생은 동아시아 문화의 역사 속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이렇게 한글을 찬양한 이는 일본인 한국어학자 노마 히데키 씨다. 전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로 판화작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매료돼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 대학에서 한국어학을 다시 전공했다. 한국어학, 일한대조언어학, 음운론, 어휘론, 문법론과 언어존재론 등을 연구하며 2010년엔 ‘한글의 탄생’으로 마이니치신문 사와 아시아조사회가 주최하는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대상을 받았다. 이 책이 한국어판 ‘한글의 기적-<문자>라는 기적’(돌베개)으로 번역 출간됐다. 한국어나 한글을 전혀 모르는 일본 독자를 위해 쓴 것이 한글을 모국어로 한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흔히 외국인이 다른 언어에 갖는 관심이나 호기심 정도를 넘어 전문적인 한국언어학 책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 깊이와 폭이 놀랍다. 한글의 음운학, 형태학, 발생학, 오늘날의 쓰임새까지 꿰뚫으며 한글의 구조와 특징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자와 일본문자, 베트남문자 등 아시아 문자들과의 비교 연구는 돋보이는 부분이다.

여기에 다양한 예문과 역사적ㆍ언어학적 상상력을 구사하며 한글 창제자들이 어떻게 말, 소리에서 글자, 문자를 석출해냈는지 밝혀가는 글쓰기는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처럼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그렇다면 저자가 가장 감탄을 금치 못하는 한글의 탁월함은 무엇일까.

‘정음(正音)’은 존재가 모호했던 모음에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를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알파벳 로드, 즉 자음자모 로드가 아시아를 가로지른 종착지에서 형태가 모호했던 모음에 비로소 형태를 부여한 게 정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한글이라는 문자를 안다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태어난 한 가지 독특한 문자 체계를 아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단음문자, 알파벳, 지중해에서 자라난 단음문자는 북방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그리스문자, 키릴문자나 라틴문자=로마자처럼 모음자모와 자음자모를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2차원적인 배열 시스템으로 꽃을 피운다. 그러나 아시아를 건너온 단음문자들은 모음과 자음이 각각의 자모로서 지닌 독립성과 단위성이 희박했다.

여기에 정음의 독창성이 발휘된다. 정음은 단음문자=알파벳 시스템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단순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기보다 원리적으로 거절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알파벳 시스템의 천년 이상 희미했던 모음의 공극을 모음자모라는 선명한 형태로 충족시켰으며, 나아가 2차원적 병렬 배열 시스템을 완전히 새로운 입체적 형태로 전환시켰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초성+중성+종성>, 즉 <자음+모음+자음> 각각에 뚜렷한 <형태>를 준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문자를 만든다>는 문자론의 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15세기 정음학이 도달해 있었던 결정적 높이”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정음 자형의 유래를 파스파문자의 모방이나 중국 남송 ‘육서략’의 ‘기형성문도’에서 그 기원을 찾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세종은 중국이든, 몽골이든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건 극한까지 배우려고 했겠지만 이를 계승하는 일은 용인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저자는 음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정음의 음성학적인 기술의 리얼리티는 가히 압도적이라고 극찬한다.

저자의 통찰이 빛나는 또 다른 지점은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혁명으로 본 데 있다. 당시 한자문화에 대한 일종의 ‘지의 혁명’이라는 게 그의 관점이다. 세종이 ‘정음 에크리튀르(글쓰기) 혁명’으로 투쟁한 상대는 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상대, 즉 역사가 쓰이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까지 꿰뚫는 ‘한자 에크리튀르’였다는 것이다. 투쟁의 상대는 바로 역사이며, 세계였던 셈이다. 이에 최만리 등 당시 지식인의 반발은 당연하다. 저자는 최만리를 둘러싼 담론의 핵심은 언어학적ㆍ문자론적 지의 지평에서 벌어진 사상 투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몇년 전 찌아찌아족의 문자로 채택된 한글의 우수성과 세계화 가능성이 외국 학자의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는 점에서 반갑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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