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철벽 마무리 오승환은 왜 근로자가 아닐까?
뉴스종합| 2011-10-29 09:05
오는 31일 한국시리즈 5차전이 펼쳐지는 잠실야구장은 최근 석면 문제로 심한 홍역을 앓았다. 그라운드에서 기준치 이상의 석면이 검출되면서 야구 선수와 심판, 그리고 관중에게 예상치도 못한 걱정을 끼쳤다. 특히 프로야구 선수들 입장에선 그동안 열심히 슬라이딩하면서 땀 흘렸던 기억이 일순간 공포로 바뀌기도 했다.

다행히 경기를 앞두고 운동장 흙은 교체될 예정이지만, 그동안 잠실운동장을 달렸던 야구 선수가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조용한 암살자’로 불리는 석면을 밟고 뛰어온 야구 선수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 석면이 검출된 잠실ㆍ사직ㆍ문학구장에서 오랫동안 뛰어온 선수들에게 관련 질병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산업재해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일반 근로자의 경우 석면과 업무 연관성만 있으면 산업재해 보상이 이뤄진다. 야구 선수도 석면이 검출된 야구장에서 오랫동안 뛰어왔기 때문에 산재 보상을 받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산재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설명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 선수는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야구 선수는 자영업자로 분류된다. 근로자가 아니면 당연히 산재보험 적용 대상도 아니다.

이처럼 프로야구 선수의 근로자성 인정 여부는 선수들의 권익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얼마 전 지병으로 사망한 최동원 한화 2군 감독이 선수 시절 선수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것도 이 같은 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선 어떠할까. 당연히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근로자로 인정받는다. 메이저리그선수노조(MLBPA)가 설립돼 있어 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한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이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선수협의회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똑같은 프로야구 선수인데, 미국에선 근로자로 인정받고 우리나라에선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국과 미국의 근로자 및 노조 인정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근로자로 인정돼야 근로기준법 등의 보호를 받게 되지만, 미국에선 사용자로부터 배타적 교섭단체로 인정받으면서 노조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근로자 기준에 맞아야 한다. 근로기준법 제2조에서는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육체근로자든, 정신근로자든 상관없이 근로의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ㆍ봉급 등 일체의 금품을 받고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 근로자로 인정받는 셈이다. 야구 선수들도 연봉계약을 맺고 구단의 지시에 따라 경기에 나서며 훈련을 받는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분명히 근로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을 실제로 집행하는 고용노동부는 다르게 해석한다. 3가지 이유로 야구 선수들의 근로자성을 부정하고 있다.

우선 야구 선수들의 땀은 순수한 의미의 노동으로 보지 않는다. 프로 운동경기는 대중 인기에 영합함으로써 흥행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활동인 순수한 의미의 노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은 근로기준법상 임금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프로 선수의 입단계약 시 체결되는 계약금 및 보수는 개개 선수의 대중 인기 등 특수 요인에 따라 그 수준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노동의 질을 결정하는 학력ㆍ경력ㆍ연령ㆍ숙련도 등 복합적인 요소에 의거 결정되는 근로기준법상의 임금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프로야구 선수와 구단주와 관계가 일반적인 기업의 노ㆍ사 간 사용종속관계와 다른 것으로 파악한다. 프로 선수는 구단주 및 감독의 지휘하에 있으나 이는 경기의 흥행 성공을 위한 개개 선수의 능력을 기술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근로기준법상 노ㆍ사 간의 근로관계로 상ㆍ하 간 이뤄지는 지휘ㆍ감독과는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행정 해석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근로관계’와 민법이 적용되는 ‘고용관계’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변호사가 소송 의뢰인의 수임료를 받고 움직이지만, 이는 사용종속관계라기보다 대응한 관계에서 맺어진 고용관계”라고 덧붙였다. 야구 선수도 구단주 등과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을 맺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사용종속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설명.

오래전 법원 판례에서도 프로 선수의 근로자성을 부정했다. 지난 1985년 서울민사지법에선 프로축구 선수 전속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 배상액의 예정에 다툼이 있었는데, 당시 판결문에선 “프로축구 선수 전속계약은 단순한 근로계약이 아니라 축구 선수로서 경기 출전에 대비한 훈련과 경기 출전만을 임무로 하는 도급적 성격이 짙게 깔린 비전형 무명계약”이라고 판시했다.

이런 판례와 고용노동부의 행정 해석이 근거가 되면서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은 아직까지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노조 설립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지적이다.

그럼 미국에서는 어떻게 해서 프로야구 선수들이 근로자로 인정받게 됐으며, 노조활동까지 하는 것일까. 시스템적으로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노조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근로자성이 먼저 인정돼야 하지만, 미국에서는 사용자가 교섭단체 대표로 인정하면 노조로 인정받는다. 근로자성은 문제될 것이 없다.

미국에선 조합원의 절반 이상 동의만 있으면 교섭 대표 노조로 인정받게 된다. 이런 교섭 대표 노조와 관련된 조합원 투표를 관장하는 곳이 대통령 직속의 MLRB(Maine Labor Relations Board)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위원회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하는 MLRB가 배타적 교섭제 운용을 위한 선거를 관리하며, 노사 모두의 부당 노동행위를 규제한다. 여기에서 대표 교섭단체로 지정되면 노조로 인정받게 된다.

근로자성 인정과 노조 설립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미국에서도 프로야구 선수들의 노조 설립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1966년 설립된 메이저리그선수노조(MLBPA)는 지난 1885년 처음으로 모임을 결성했지만, 세 차례에 걸친 해체와 재건이 있었다. 이후 메이저리그 노조는 엄청난 단결력을 바탕으로 지난 1994년 최악의 파업을 겪기도 했다. 당시 메이저리그노조는 셀러리캡(salary cap) 도입을 둘러싼 구단주들과의 갈등이 파업으로 확산되며 938경기가 취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메이저리그노조는 FA제도 도입, 선수 연금, 최저연봉제 보장, 선수 초상권 등에 걸쳐 노동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고용노동부 측에선 “우리나라 야구 선수와 미국 선수들의 근무 형태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국가별로 차이가 있다”며 “미국에서는 해고가 자유롭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한 점 등 똑같은 기준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만 유지하고 있다.

박도제 기자/pdj24@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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