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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10년만에 반토막... 서민의 팍팍한 삶, 정도 사람진다.
뉴스종합| 2011-11-25 09:45
엄한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 정(情)을 보여줬던 날이 있다. 바로 일요일 새벽, ‘목욕탕’ 가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잠에서 덜 깨 부스스한 아들을 데리고 꼭 새벽녘에 목욕탕으로 향했다. ‘이태리 타올’은 필수였다. 아버지는 “새로 받은 물로 씻어야 기분이 개운하지”라고 말씀하셨다. 뿌연 수증기가 꽉찬 욕탕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밀어줬다. 등을 밀어주면서 아버지는 “왜 엄마에게 대들었니”부터 시작해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 등 아들과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아버지가 때를 밀어주면 아팠지만, 목욕 후 사주는 바나나 우유 때문에 아들은 꾹 참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들도 아버지의 등을 밀어줬다. 아버지의 등판은 참 넓었다. 밀어도 밀어도 넓은 아버지의 등판. 아버지가 제일 힘쎄 보였고, 아버지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다. 그만큼 멋있어 듬직해보였다.

부자(父子)는 그렇게 정을 나눴다. 딸도 그랬다. 어머니와 같이 간 동네 목욕탕에서 모녀(母女) 역시 때를 밀어주고, 얘기를 하며 서로 가까워졌다. 이렇게 가족간 사랑을 돈독케했던 동네 목욕탕. 그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목욕탕 업주들은 목욕탕이 사라지게 된 때를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라고 말한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목욕탕을 하는 한 업주는 “IMF 이후로 지난 10년 동안 유가가 300% 이상 오르면서 유지가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목욕중앙회에 따르면 지난 1997년 당시 2300여 곳이던 대중탕이 현재 1200여개로 정도 줄었다. IMF를 거치면서 반토막이 났다.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면서 가족 파괴 현상도 심해졌다. 패륜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젊은이들도 보기 힘들다. 중고등학생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산다. 지하철을 타도 어르신이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도 않는다. 선생님이 ‘사랑의 매’를 들면 학생들은 쌍욕을 하며 대들기도 한다.직접적인 연관성을 찾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는 모습은 또 자영업의 붕괴를 보여주기도 한다.

IMF때까지만 해도 부유층에 겼던 동네 목욕탕 주인들은 이제 중산층에도 끼지 못하게 됐다. 하루 벌어 하루 쓰기 바쁜 상황에서 어떻게 아들, 딸을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 갈 시간도, 여유도 없다. 동네 목욕탕이 사라진 이유는 아파트 등이 들어와 주거 환경이 좋아져 목욕탕에 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목욕보다는 ‘샤워’로 목욕문화가 바뀌기도 했다. 여기에 대형 찜질방이 들어서기도 했다. 동네 목욕탕은 서럽게 더 후미진 곳, 더 구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손잡고 간 동네 목욕탕에서 동네 아저씨를 만나 인사를 했지만 이제는 인사할 동네 아저씨, 동네 형이 없다.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으니 소위 망나니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동네 목욕탕이 그립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일본에서는 200m~300m 거리제한을 두고 목욕탕 설립을 제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무한경쟁이라는 자본주의 논리로 자본만 있다면 더 크고, 더 멋진 대형 찜질방을 지을 수 있다.

김수철 사무총장은 “현대화로 인해 한국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가 사라지는 것은 대중탕도 마찬가지”라며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등을 밀어주면서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태형 기자 @vmfhapxpdntm>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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