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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가서도 日사죄 받아낼 것”
뉴스종합| 2011-12-13 11:27
1992년 1월부터 항의시작

눈·비 맞으며 20년간 투쟁

이젠 273명중 66명만 생존



13일 오전 8시 한 명의 꽃봉오리가 한을 품은 채 떨어졌다. 14일 있을 1000번째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채…. 중국 하이난도 등지에서 성노예 생활을 한 김요지(83) 할머니. 평생 한을 풀겠다며 목청을 높였던 김 할머니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20년이 흘렀다. 정부에 등록된 234명의 정신대 할머니 중 171명이 숨졌다. 강점기 때 일본에 유린당했던 234명의 소녀들은 일본대사관앞에서 메말라가며 시들어갔다. 팔순이 훌쩍 넘어버린 할머니들은 일본정부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바랐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꽃들은 그렇게 지고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지난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14일이면 1000회를 맞는다. 처음엔 20여명이 모였다. 세상에 나서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서로가 힘이 됐다. 그렇게 모여서 20년을 버티고 1000회를 맞았다. 273명 할머니의 마른 몸으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리쳤지만 그들은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살아 남은 66명 할머니의 평균나이는 만 86세가 됐다. 2006년 이후에 매년 10여명의 할머니들이 죽고 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을 때 일본의 사과가 있어야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사람, 남겨질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지난 1992년 1월 8일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은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과감히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섰다. 그로부터 20년. 이들은 매주 수요일, 모두‘ 999번’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학(鶴) 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던데….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혀 바뀐 게 없다. 사진은 1992년 1회 집회 때 모습.                                         사진제공=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길원옥(84) 할머니는 “살아있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위안부 문제가) 끝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낼 것”이라 했다. 김 할머니는 13살 때 만주에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85) 할머니도 아직 살아 있다. 살아남아 지난주에 열린 999회 집회에도 나갔다. 그는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그냥 몇 번 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나갔지만 20년이나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밖에서 비바람 맞으면서 사죄하라고 소리치는 것도 이젠 지칠 대로 지쳤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집회에서 일본 대사관을 바라보면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는 “이젠 그만 묻어버리고 싶은데 집회 다녀오면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고 했다.

허미래 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 팀장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수요집회는 끝이 아니다. 젊은 후손들이 나갈 것이다. 남아 있는 할머니들을 위해서라도…”라고 했다.

박병국 기자/c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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