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에게 ‘옹기’는 그저 할머니, 어머니들이 쓰시던 ‘항아리’로 각인돼 있어요. 기껏해야 된장 뚝배기쯤이요? 그런데 전통방식 그대로, 좋은 흙과 유약을 써서 만든 옹기는 웰빙을 추구하는 현대생활에 더없이 잘 부합되죠. 전통 옹기엔 보이지않는 미세한 숨구멍이 있어 살아 숨쉬는 그릇이니까요. 문제는 현대생활에 맞게끔 세련되고 간결한 디자인의 옹기가 폭넓게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저도 책임을 느끼죠."
국내 최대의 옹기집산지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의 외고산옹기마을에서 3대째 옹기장인으로 활동 중인 허진규 씨(47,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가 서울 강남에서 작품전을 열고 있다. 강남구 신사동의 우리그릇 려(대표 박은숙) 초대로 오는 1월21일까지 ‘허진규의 옹기’전을 여는 허 씨는 "옹기야말로 살아숨쉬는 냉장고"라고 강조했다. 김치를 넣어둘 경우 사각사각한 김치맛이 잘 보존되는가 하면, 물을 담아두어도 물맛이 더 좋아진다는 것.
허 씨는 이번 전시에 독특한 합 형태의 ‘반(半)곤쟁이’ 옹기를 비롯해 밥 공기및 국대접으로 쓸 수 있는 보시기, 크고 작은 항아리, 막걸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 등 다양한 디자인의 옹기들을 선보이고 있다. 출품작들은 단순하면서도 전통적인 미감을 살린 형태와 빛깔, 특유의 덤덤한 질감이 넉넉함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매끈한 현대 주거공간과 식탁에 풋풋한 전통옹기가 썩 잘 어우러진다는 점. 이는 옹기가 요란한 장식과 디테일이 없어, 다른 아이템에 부드럽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전시작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납작한 뚜껑이 한 세트를 이루는 ‘반곤쟁이 옹기’. 우리 선조들이 곤쟁이 젓갈(생새우 젓갈)을 담았던 길쭉한 형태의 ‘곤쟁이젓 옹기’의 키를 반으로 줄여 ‘반(半)곤쟁이’라고 이름 붙인 이 옹기는 뚜껑이 있어 김치 한포기를 담아두기에 적당하다. ’냉장고 속의 냉장고’를 표방하는 이 반곤쟁이에 김치를 담아 보관할 경우 김치가 적당히 발효되는 것은 물론, 냉장고 냄새도 빨아들여 일석이조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은숙 대표는 "허진규 장인의 옹기를 구입한 고객들이 "정말 숨쉬는 그릇일까?"하고 긴가민가하면서 사갔다가 "음식맛이 살아나 놀랬다"며 밥공기와 보시기, 항아리를 더 사러 오곤 한다"며 전시 개막 이래 ’옹기 마니아’가 제법 생겼다고 전했다. 천연재료를 사용해 무해 무독하고, 높은 온도에서 구워 강도가 높은 것도 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또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막걸리를 담는 항아리는 막걸리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옹기작업에 뛰어든지 어느새 30년째인 허진규 씨(울산 옹기골도예 대표)는 국내 옹기분야에서 꽤 알아주는 인물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그는 "부모님은 옹기쟁이의 길이 너무 힘들다고 말리셨는데 왜 그랬는지 나는 중학교도 안간채 온갖 밑일을 도맡으며 옹기장인을 꿈꿨다"고 회고했다. 옹기의 원료(흙)를 채취해 흙탕을 만들고, 잡물을 제거하는 ’밑일’부터 시작한 그는 흙과 하나 되는 법을 배우느라 학교도 마다해, 뒤늦게 검정고시로 학업을 마쳤을 정도다.
허 씨는 울산 지역의 태토와 참나무 재를 사용한 유약, 전통적인 물레방식과 전통가마를 고집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옹기공방을 넘겨받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기계 장비를 죄다 내다버린 겁니다. 여러모로 편리하고 작업속도가 빨라 울산 옹기골에서도 기계작업을 병행하죠. 그런데 저는 장비를 모두 없애고, 완전히 전통적인 옹기작업에 매달렸어요. 첨단 현대사회로 갈수록 오히려 전통을 더 고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거죠. 그 고집 때문에 고생을 몇배로 하긴 했지만 지금은 전통적인 물레방식과 유약, 건조및 번조 방식이라 좀 알아줍니다. 물레시연과 워크숍을 위해 국내는 물론, 미국이며 유럽 등 안가본 곳이 별로 없으니까요. 이화여대에서도 전통옹기 특강을 했죠"
그는 "전통 옹기는 지역마다 제작 기법이 조금씩 다르다"고 들려준다. 경상도 식인 허진규 장인의 옹기 제작과정은 ’흙 밟기-질재기(흙덩이를 떡가래처럼 길게 만드는 작업)-태림질(긴 흙덩이로 옹기벽을 둥글게 쌓아올리는 과정) -수래질(옹기벽을 고르게 두들기며 형태를 매만지는 과정)- 전잡기(항아리의 주둥이(전) 부분을 만드는 작업)- 잿물 입히기-환치기(유약을 입힌 옹기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건조(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서 말리는 과정)-가마서리(장작 가마에 건조한 항아리를 쌓는 것)-번조(가마에 불을 지펴 낮은 온도에서 1100도까지 높혀가며 장시간 굽는 과정)’ 등 약 10단계를 거친다. 큰 항아리 같은 경우는 한달이 소요된다. 여름에는 긴 장마로 습도가 높아 옹기를 말리려면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허진규 장인은 일반인들을 위해 좋은 옹기와 나쁜 옹기의 차이점도 들려주었다.
<좋은 옹기를 가름하는 기준>
1. 친환경 소재인 황토로 만들어 환경호르몬이 들어있지 않다.
2. 부엽토와 재로 만든 잿물을 입혀 구워 몸에 해가 없다.
3. 우리 몸에 유해한 균류와 곰팡이 서식을 막아주고, 음식냄새도 제거해준다.
4. 음식의 산성화를 지연시켜 신선하고 맛좋은 발효식품을 섭취할 수 있게 한다.
5. 통기성이 좋아 쌀독으로도 사용 가능하고, 숙성 발효식품 저장에 유용하다.
6. 기공이 수분을 빨아들여 밖으로 기화시켜 물맛을 시원하게 해준다.
7. 사용하다 깨졌을 경우 성분이 모두 자연소재여서 흙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문제점을 안고 있는 옹기의 특징>
1. 중금속 물질 광명단을 사용한 경우 인체에 유해하다.
2. 인체에 치명적인 납이 계속 녹아 나올 수도 있다.
3. 800도가 안 되는 온도에서 구워내 조금만 부딪혀도 쉽게 깨진다.
4. 옹기 표면막이 숨을 쉬지 못해 음식물을 담가두었을 때 발효가 잘 안된다.
5. 쌀독으로 사용하였을 경우 처음에는 괜찮으나 나중에는 벌레가 생긴다.
6. 발효음식인 장이나 김치를 보관했을 경우 신선도 유지되지 않고 썩는다.
7. 화학약품이 섞여 있어 깨졌을 경우 자연에 손상을 끼쳐 비환경적이다.
허진규 장인은 "좋은 옹기를 간단하게 구별하려면 비닐 랩을 밀착시켜 보라"고 귀뜸했다. 제대로 된 옹기는 숨 쉬는 미세구멍이 있어 랩이 밀착되지 않고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어 "현대인의 삶 속에서 무덤덤하나 속 깊은 전통옹기가 많이 파고들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피력했다. 02)549-7573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