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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었다고 둥글둥글할 수만 없었지…”
엔터테인먼트| 2012-01-31 10:01
석궁테러사건 진실 파헤치려 제작
김명호 교수·박훈 변호사 만나니
한편의 버디무비 절로 그려져

본명·구치소 모두 바꿔 사용
영화 법적 시비는 없을 것


“제가 원래 젊게 살아요. 철이 없는 거지. 스무 살 정도는 나이를 거꾸로 먹은 거지.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둥글둥글 마모되고 사람에 대한 포용력도 커지고 사물에 대한 깨달음도 온다지만, 너무 명약관화한 것에도 두루뭉술해지면 성인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적 발언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꼭 해야 되는 상황에 있다면 비판적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지식인 된 도리 아닐까요?”

한국영화계에서 예순이 넘은 나이라면 뒷방을 차고 앉아 ‘에헴’ 하는 기침 섞은 잔소리나 가끔 하면서 ‘어른’ 대접을 받는 게 예사라지만 정지영(66) 감독은 14년 만의 신작 ‘부러진 화살’에서 날선 현실감각을 보여준다. 자칫 딱딱한 교훈조나 비장한 사설조가 될 법한 실화 소재의 영화에서 20대 젊은 관객마저 들었다 놨다 하는, 재기 넘치는 유머와 매끄러운 리듬감각은 ‘부러진 화살’의 빛나는 미덕 중의 하나다. 

‘부러진 화살’은 ‘석궁테러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실제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수학과 조교수로 재임 중이던 김명호 교수가 대학별 고사 수학 출제 문제에 오류가 있다며 지적한 후 부교수 승진과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김 교수는 이에 반발해 교수 지위 확인 소송에 나섰으나 결국 패소한 후 재판 결과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2007년 담당판사를 찾아가 석궁을 들이댔다. 이 사건은 ‘사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당시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결국 김 교수는 거듭된 항소심 끝에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지난해 만기출소했다. 


실제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는 극중 각각 김경호와 박준(박원상 분)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주요 공판내용은 실화에 바탕해 재구성했다. 영화는 판사를 찾아간 김 교수가 실제 석궁을 쏴 상대가 부상을 했는지, 석궁을 들고 위협만 했을 뿐인지를 가리는 공판 과정을 주로 그린다.

영화 속에서 검사와 판사 등 사법권력은 뻔뻔하고 파렴치하고 무원칙하며 이기적이고 탈법적인 집단으로 묘사된다. 국민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안성기가 김 교수 역할을 맡아 바보스러울 정도의 철저한 원칙주의자를 연기한다. 그게 오히려 관객들에겐 능청스러운 유머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지난 18일 개봉해 첫 주 2위에서 두 번째 주말엔 1위에 오르며 누적관객 187만명을 돌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지만 정작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문성근 씨의 추천으로 동명의 르포를 읽게 됐는데 저조차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진실을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영화화에 착수했죠.”

정 감독은 1998년작 ‘까’를 마지막으로 이후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아리랑’과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은지화’, 사극 ‘울밑에 선 봉선화’ 등 몇 편의 프로젝트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그러던 중 만난 ‘부러진 화살’은 정 감독의 영화적 구미를 확 잡아당겼다.

“일단 공판기록이 흥미진진하더군요. 그다음엔 김명호 교수를 만났더니 또 그 양반이 아주 재미있어요. 자료 보강을 위해 당시 사건의 김 교수 측 변호사(박훈)를 대면했더니 그분도 역시 한 ‘캐릭터’ 하더라고. 그래서 둘을 주인공으로 한 버디무비로 작정했죠.”


‘부러진 화살’이 지난해 말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후 화제가 되면서 법조계가 술렁거렸고, 최근엔 사법부에서 일선 판사들에게 ‘대응지침’까지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감독은 “영화는 공판기록을 거의 그대로 담았지만 사건 당사자와 관계자들의 본명이나 지명, 구치소 등 논란이 될 부분은 모두 바꿨기 때문에 법적 시비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 감독은 지난 1982년 데뷔해 베트남전을 다룬 ‘하얀전쟁’,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남부군’ 등 문제작을 내왔던 한국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감독으로 꼽힌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미국, 독일, 일본 등 전후 문학작품이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양분이 됐고, 한국영화사의 리얼리즘 걸작 ‘오발탄’(감독 유현목)이 ‘영화적 뿌리’가 됐다고 밝혔다.

“현대사를 많이 다뤄왔죠. 그래서 돌이켜보니 제가 천착하고 있는 화두는 권력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디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왜 분배가 안 되고 누군가에 의해 독점이 되는가, 그것이 개개인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가라는 데 가장 큰 관심이 있습니다.”

정 감독의 아들 상민(37) 씨는 ‘부러진 화살’의 공동제작사인 아우라픽쳐스의 대표이자 영화감독으로, 2대가 영화인의 핏줄을 내림하게 됐다. 새해 초 만난 정 감독은 “앞으로 서너 편 정도를 더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덧붙였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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