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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뒷전-그리스 국민, 역사적 결정 앞에 자국을 불태우다
뉴스종합| 2012-02-13 11:24
“국가파산 위기에서 시위는 일종의 사치다”(루카스 파파데모스 그리스 총리) vs “독일의 노예가 되느니 명예롭게 죽겠다”(그리스 국민)

12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 의회 앞과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일대. 두 도시를 합쳐 10만여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과 충돌해 그리스의 밤 하늘이 화염과 매캐한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국가부도에 내몰릴 수 있는 현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그리스 국민은 ‘폭력’을 선택했다.

그들은 국가적 위기는 아랑곳않고 자신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데 대한 불만만 표출했다. 유로존과 국제통화기금(IMF)이 1300억유로의 2차 구제금융 지원조건으로 내건 ▷최저임금 22% 삭감 ▷연내 공무원 1만5000명 감원 등을 통해 올해에만 33억유로(2015년까지 총 130억유로)를 줄이는 긴축안에 극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들의 현실인식은 암울했다. 청년층은 물론 노년층까지 긴축안을 통과시키려는 정부와 의회를 싸잡아 비난하며 시위대의 세를 불렸다.

시위에 참가한 스텔라 파파파고우(82ㆍ여)씨는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검은 복면을 벗으며 “(독일이 중심이 돼 요구하는 긴축안은) 40년대 나치가 점령했던 때보다 더 나쁘다. 자존심을 굽히느니 명예롭게 죽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긴축안으로 그리스 국민들을 옥죄는 데 앞장서고 있는 쪽을 독일로 지목하고 악감정을 표출한 것이다. 
그리스 의원들에 대한 불만도 고조됐다. 보험 판매원인 마키스 바바로소스(37)씨는 “그리스 의원들은 모두 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에게 (긴축안에 따라 축소된 금액인) 연금 300유로에 난방도 안되는 아파트에 살라고 하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가”라며 “의원들은 300개의 올가미 같은 존재”라고 비꼬았다.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국난극복을 위해 ‘금모으기 운동’을 했던 일화는 그리스 국민에겐 ‘해외토픽’에서나 접한 먼나라 얘기일 뿐이다. 최근 그리스를 방문했던 장지종 중소기업연구원장은 “그리스에서 금모으기 캠페인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국민은 관심이 없다”며 “국민이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고 또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아 위기는 심화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이 필요함에도 이를 거부하고 나중에 경제 회복이 실패하면 정치권을 비난하는 악습이 재연될 공산이 높아보인다.

이날 시위로 아테네에선 적어도 80명(시위대와 경찰 포함)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45명의 시위자가 체포된 것으로 AP와 그리스 언론은 전했다. 또 아테네에서만 최소 15곳의 상점이 불탔고 약탈행위도 곳곳에서 목격됐지만, 정확한 재산ㆍ인명피해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루카스 파파데모스 그리스 총리는 시위에 대해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파괴행위로 용납되지 못할 것”이라며 “지금같은 중요한 시점에 항위시위를 벌이는 것은 사치”라고 말했다. 중도 우파인 신민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도 “통제 불능의 파산이라는 심연으로 빠져들면 공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며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긴축안을 가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의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 같진 않다. 엔지니어인 안드에 마라고다키스(49)씨는 AFP에 “긴축안대로 사는 건 어렵다. 2020년까지 우리는 독일인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방만한 국가 연금시스템에 기대 살던 체질이 고착화한 탓에 ‘리조트 국가’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음에도 자구책을 거부하는 그리스인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최근 “그리스는 특이하다”고 토로하며 “다시는 이런 경험을 되풀이 해선 안된다”고 했다.

1300억유로의 긴급자금이 투입돼 국가부도사태라는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이런 국민성이라면 유럽의 ‘골칫덩이’라는 오명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홍성원 기자@sw927>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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