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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뿜는 용’에서 ‘치유하는 피아니스트’로, 암 극복 재기성공한 피아니스트 서혜경
라이프| 2012-03-08 09:16
2006년 9월,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될 즈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피아노는 더이상 칠 수 없다’는 의사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그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맞섰다. 해외에 있는 의사들마저 모두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천사처럼 나타난 사람이 노동영 서울대병원 박사였다. 신경과 근육세포를 최대한 살리고 암세포만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엔 “피아노를 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3일 만에 퇴원했다. 방사선 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을 땐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1년간 아들과 딸을 만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독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한 피아니스트 서혜경(52)이다. 인생 제2막을 성공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그를 최근 서울 서소문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후두염에 걸려 연방 기침을 하면서도 그는 대화 내내 넘치는 에너지를 감추지 못했다. ‘불을 뿜는 용’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싶었다.


▶사이렌 서혜경, “마성의 소리에서 치유의 소리 내기까지…결국엔 ‘피아노의 신’이라고 불리고파”

“러시아에서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곡 녹음을 하던 중 이틀째 되는 날이었어요. ‘쿵쾅쿵쾅’ 밖에서 요란한 망치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인부들이 연주장 미장 공사를 하더라고요. 공사를 중단시키고 녹음을 계속했는데, 나중에 보니 일하던 인부들이 극장에 들어와 제 연주를 한 시간 넘게 듣고 있는 거예요. 그때 참 행복했어요.”

사이렌(siren)이 떠오른다. 얼굴과 몸은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지만, 하반신은 물고기의 모습을 한 바다의 요정. 사이렌의 노래소리는 많은 뱃사람을 홀려 노래를 듣다가 바다에서 죽게 만들 만큼 아름답다.

11년 넘게 친구이자 매니저로 서혜경의 옆을 지킨 허효길 대표도 같은 말을 했다.

“어찌나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지…. 같이 다니다 보면 저도 가끔은 욱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서혜경이 내는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모든 게 용서 된다니까요. 예전에 한 팬이 ‘국보급 손가락’이라며 서혜경의 손을 보험에 가입시킨 적이 있을 정도죠.”

허 대표는 ‘서혜경표 마성의 피아노 소리’ 때문에 매니저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한때 서혜경에게는 ‘활화산’ ‘폭풍건반’이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얼마나 힘이 넘치는 연주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별명이다. 그가 내는 소리는 웬만한 남자 피아니스트 못지않다.

서혜경은 자신의 손을 보여주며 “이 솥뚜껑같은 손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예쁜 손에서는 예쁜 소리가 안 나온다”고 말했다. 어릴 때 ‘한 미모’했지만 스파르타식 피아노 연습으로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다보니 지금은 ‘한 덩치’하는 몸매를 갖게 됐다. 그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다시 태어나도 호리호리한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묵직하고 힘있는 피아노 음색은 그가 온몸으로 토해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유방암으로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얻은 것도 있다. 파워 넘치는 소리에 깊은 울림까지 더한 ‘치유의 소리’를 연주하게 된 것. 암을 극복한 연주자의 소리는 곧 희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혜경은 ‘앓던 병도 나을 것 같다’는 팬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연주자로서 행복함을 느낀다.

그런 그가 새로 얻고 싶은 별명이 하나 있다. 바이올린의 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피가니니처럼 ‘피아노의 신(神)’이라는 별명을 얻는 것이다. 세상에 나온 모든 피아노곡을 다 연주해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피아노에 관한 한 서혜경의 욕심은 끝이 없다.



▶엄격한 부모 밑에서 늘 애정 갈구하며 살았기에…백만불짜리 손가락으로 딸 아들과 ‘카카오톡’하는 절친 엄마로 살아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래도 딸과 아들이 있어서 마음의 위안이 됐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제일 잘한 일이구나 싶었고요.”

서혜경은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이소윤 씨의 손에 이끌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성에 갇힌 공주’라 불릴 만큼 친구를 사귀지도, 만나지도 못한 채 옥탑방에서 피아노 연습만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연습을 마친 후에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부조니 콩쿠르에 나가기 전 그의 어머니는 극도의 긴장감도 이길 수 있어야 한다며 불을 끈 깜깜한 방안에서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하루 16시간씩 무리하게 연습해 오른팔 근육 마비가 왔을 땐 지압 자격증을 따서 뉴욕까지 날아와 서혜경을 다시 무대에 세운 것도 어머니였다.

서혜경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서원석 성원제강그룹 회장이다. “총탄이 오가는 한국전쟁 속에 목숨을 부지하고, 꼭 성공하겠다며 혈서를 쓰신 분이에요. 지금도 아버지는 회사에 자장면 드시는 본인 사진을 걸어놓고 ‘근검절약’을 강조하세요. 낡아 깃이 헤진 셔츠나 지갑을 자랑으로 여기는 분이죠. 집념이 대단한 분이에요.”

국내외 무대에 이름을 알리며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는 데 그의 부모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딸 서혜경’보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서혜경’을 늘 앞세운 부모 아래 서혜경은 지독한 외로움 속에 애정을 갈구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아이들을 친구처럼 대한다. 하루에 30분 이상씩 통화하는 건 기본. 연주생활로 바빠도 수시로 카카오톡을 통해 사소한 일상도 주고받는다.

딸 문정(20) 씨는 태권도 뉴욕대표 선수로 활동할 만큼 매사에 적극적이고 공부도 곧잘 해 현재 보스턴 비즈니스스쿨에 재학 중이다. “딸이 태권도를 했잖아요. 방학 때면 제 개인 트레이너를 자청해 한시간 반씩 운동을 시킨다니까요. 엄마라고 봐주고 그런거 없어요. 지금 제가 한국에 있어도 계속 운동프로그램을 저에게 보내줘요. 이대로 하라는 거죠. 제 딸이지만 독해요, 진짜.”

그 엄마에 그 딸이다. 서혜경은 암에 걸려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다 머리카락이 빠져도 나만큼은 안 빠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스스로를 강인하다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항암치료 2주 만에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해 한 올도 남지 않았을 땐 신체의 한계와 생명의 나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딸이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45일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은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사선((死線) 앞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엄마를 누구보다 챙기는 아이들이지만 서혜경이 힘들다고 투정이라도 부리면 “엄마가 원해서 가는 길이잖아”라고 똑부러지게 말한다. 아이들은 ‘엄마 서혜경’에겐 친구고 ‘피아니스트 서혜경’에겐 든든한 버팀목이다. 때문에 서혜경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아들 딸 세트로 낳은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피아노 덮개가 내 관 뚜껑처럼 보이고, 88개의 건반이 상어 이빨처럼 보여도…

“피아노 치느라 사춘기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20대 중반 늦은 반항기가 왔는데 그때는 피아노 덮개가 내 관 뚜껑처럼 느껴지고, 피아노 건반이 상어 이빨처럼 보이더라고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으면 마치 저를 물어뜯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피아노를 떠나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서혜경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삶의 모든 순간은 피아노 없이 떠올리기 힘들었고 ‘피아노 외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마저 깨달았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였고, 가장 슬펐을 때는 ‘팔근육 마비로 피아노를 칠 수 없었을 때’였던 것.

“병원에 다닐 땐 의사가 되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결국 예술가가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잘 아니까요. 구속받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거든요.”

피아니스트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수시로 찾아드는 지독한 외로움마저 고독으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됐다.

“새로운 곡을 완벽히 익히기 위해 1500번 이상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미칠 것 같아서 피아노 밑에 숨어버리고 싶은 때도 있어요.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외로움은 혼자 있는 괴로움’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라고. 외로움말고 고독을 택하자 생각했죠.”

암을 극복한 뒤 서혜경의 무대를 향한 열정은 더 뜨거워졌다. 재기 무대를 가진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새끼손가락을 다쳤을 땐 9개 손가락만으로 연주를 했고, 발목이 부러져 목발을 짚고 다니는 와중에도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을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곡 녹음을 마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다음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을 정도다. 어디서 그런 열정과 에너지가 샘솟는지 묻자 “에너지는 쓰면 쓸수록 더 많이 생긴다. 천성이다”며 웃어보인다.

이젠 서혜경은 당당히 말한다. “피아니스트는 내가 이룬 꿈이고, 세계적 피아니스트를 넘어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내가 이룰 꿈이죠.”



▶결국엔 재능 나누는 삶 살고파…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을 세계에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서혜경은 ‘재능 기부’에도 관심이 많다. 암진단을 받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꼭 해야 할 일을 떠올려봤다. 그래서 2008년 8월 미국에 서혜경재단을, 2009년 9월 한국에는 서혜경예술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이후 고아원이나 병원 등지에서 무료 연주회도 펼치고 재능있는 피아노 영재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줬다. 현재 경희대 음대 교수로 후학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는 서혜경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어오며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경험을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연주회나 녹음 일정만도 빠듯하지만 현역 피아니스트로서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떻게 하라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요. 그 자리에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연주를 바로 보여줘버리거든요. 제자가 오랜 시간 고민해오던 것에 대해 제가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보람있는 일이죠.”

그는 엠티도 가고, 노래방도 들러 ‘불타는 밤’을 보내기도 할 만큼 제자들과 허물없이 지낸다. 본인은 스파르타식으로 연습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독립심을 키워주고 싶어 연습할 곡목도 각자 알아서 선택하도록 할 만큼 울타리를 크게 쳐준다. 하지만 일단 서혜경의 제자가 되면 ‘선공부 후놀기’를 철칙으로 지켜야 한다. 지각을 하거나 성실히 과제를 수행하지 않는 제자는 스스로 알아서 “교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반성의 메시지를 남길 정도다.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땐 ‘왜 하필 나한테…’라는 생각에 원망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피아니스트로서 영광의 순간도 경험했고, 암 진단으로 좌절의 순간도 경험한 셈이니 제자들에게 더 많은 걸 말해줄 수 있죠. 연주자의 소리는 ‘성숙’과 함께 깊어지니까 피아니스트보다 아티스트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황유진기자@hyjsound> /hyjgogo@heraldcorp.com 

사진=박해묵기자/ 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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