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춤추는 초록물결 생명력…보리밭, 숨이 턱 멎는다
라이프| 2012-03-13 10:15
싱그러운 그림속 여성누드
도발적인 포즈 등 파격적
전통 채색화 현대적으로 발전
신작에 초기작품까지 총망라


“태양이 아직 열기를 뿜기 전인 6월 초순이면 나의 보리밭 스케치여행이 시작된다. 배낭에 간단한 화구만 챙겨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간다. 낡고 굉음이 요란한 직행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여쯤 달리면 드넓은 보리밭이 눈에 들어온다. 들판에 펼쳐진 청맥(靑麥)을 가까이 다가가 보면 숨이 멎을 것 같다. 실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태양 아래 보리밭에선 소름끼치도록 요기스러운 초록빛 공기가 감돈다.”

이숙자(70ㆍ전 고려대 교수)는 보리를 그린다. 또 보리밭과 여성 누드를 결합하기도 한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작품전을 꾸렸다. 우리 채색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온 이숙자가 ‘이숙자의 색채 여정’이란 제목으로 서울과 부산에서 25번째 개인전 갖는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4월 1일까지, 부산 해운대 가나아트부산에서는 4월 4~17일 전시를 연다.

자화상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한 이숙자 화백.

1970년대 중반부터 40년 남짓 보리를 그려온 이숙자는 그러나 서울 출신이다. 그것도 서울 사(四)대문 안 토박이다. 종로구 운현궁 옆 익선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숙명여중, 서울사범, 홍익대와 대학원을 나와 보리밭, 황소, 백두산을 그렸다. 서울 토박이치곤 의외다.

이숙자가 보리밭을 처음 만난 건 10세 무렵. 한국전쟁으로 충북 옥천으로 피란을 갔던 그는 옥천 암곶말에서 온천지가 초록빛으로 넘실대는 보리밭을 생전 처음 맞닥뜨렸다. 그것은 엄청난 쇼크였다. 그러나 가난한 집 장남과 결혼해 바삐 사느라 보리는 까맣게 잊혀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시동생의 초대로 아이들과 포천 자취집을 찾았다가 보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산등성 아래 내리막에 장대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본 순간, 이숙자는 시간과 음향이 정지된 듯 넋을 잃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부터 여름 내내 포천 보리밭을 찾아 스케치에 빠져들었고, 그의 섬세한 감수성에 의해 건져올려진 ‘보리’라는 소재는 한국화의 새로운 표현대상으로 부상하게 됐다. 이숙자는 보리가 익어가며 알맹이가 톡톡 불거질 때면 생명의 경이감을 느낀다고 했다. 또 단단하게 감겨진 가슴 속 응어리가 스르르 풀려나가는 것 같다고도 했다.

푸른 보리밭에 여성 누드를 곁들인 이숙자의 채색화 ‘이브의 보리밭-몽환’(2010년작). 보리밭이 상징하는 질긴 생명력과 전통적 굴레에 저항하는 듯한 이브의 이미지는 한국적 삶의 근성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문학적 변주로 평가된다. 그림 속 몽환적이면서도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로써의 여성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겨울의 보리, 봄의 보리, 수확을 앞둔 보리가 모두 다르다고 했다. 특히 6월 하순 황맥이 돼서 수염이 번쩍이면 잘생긴 젊은 왕자가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물론 평생 ‘보리밭 작가’로만 규정되는 게 싫고, 보리알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그리는 보리그림이 너무 힘들어 다른 실험도 해봤다. 그러나 어느새 보리로 되돌가더라는 그는 “80년대 말 보리밭에 이브를 집어넣으며 그 같은 갈등이 씻은 듯 사라졌다”고 되뇐다.

이숙자는 보리밭 말고도 다른 작업도 많이 했다. 초창기에는 정물화ㆍ동물화ㆍ인물화를 연마했고, 백두산 천지에 매료돼 가로 14m가 넘는 초대형 작품 ‘백두산’도 그렸다. 황소를 소재로 한 과감한 추상작업도 시도했다.

“보리밭 작업에선 보리수염의 표현이 중요하다. 눈에 띄게 굵게 그어진 수염은 세필로 반을 쪼개고, 하얀색 수염이 포개져 있으면 그 중 한 개는 다른 색으로 바꾼다. 또 속도감이 약해서 수염의 기가 살지 않는 수염은 다시 살리기도 한다. 수염의 굵기와 빛깔에 변화를 주다보면 어느새 초록빛 안개가 서린 작품이 완성된다”고 밝혔다.

요즘 그는 여성 누드 작업에 푹 빠져 지낸다. 눈부시게 핀 꽃 사이로 에로틱한 포즈의 여성 누드를 곁들인다. 여성 체모와 머리카락을 한 올씩 그리다가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다.

이번 전시에 이숙자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보리밭 그림을 초록빛, 황금빛, 은빛, 보랏빛 물결까지 다양하게 내놓았다. 순지를 다섯 겹씩 덧대 만든 캔버스에 에메랄드, 수정 같은 보석 원석을 갈아만든 석채(암채)로 그린 보리는 화면 밖으로 뚫고 나올 듯 리얼하다. 싱그러운 보리밭에 뇌쇄적인 여성 누드를 결합한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는 커다란 눈의 서구형 미인이 보리밭에서 도발적인 포즈를 취해 매우 파격적이다.

그는 “칠순에 접어드니 체력이 전같지 않아 누드화 작업에 비중을 더 두고 작업한다”며 신작 ‘이브-봄 축제’ 등을 공개했다.

보리 그림에 반닫이 등을 그린 초기작업까지 망라돼 총 40점의 회화와 크로키 30여점은 한국적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끈질기게 추구해온 이숙자의 조형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02)720-102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