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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여의도 증권가, 다시 쓰는 허생전
뉴스종합| 2012-04-25 11:42
10년간 꾸준한 펀드운용…위험이 ‘관리’된 수익추구

뛰어난 수익률로 결실 맺어…더 많은 허생들 나타나길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은 비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작정한 10년 공부를 채 마치지 못한다. 장사로 큰 성공을 거뒀다지만, 앞선 10년 계획이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왜 ‘10년’인지는 소설에 설명이 없지만, 인간의 시계로 10년은 분명 긴 시간이다.

그런데 21세기 여의도에도 10년 공부에 성공한 두 사람의 허생이 있다. 지난주 설정 10년이 된 마이다스에셋의 커버드콜펀드를 운용한 허필석 대표와, 금주 탄생 10년째가 된 신영마라톤펀드를 운용한 허남권 전무다. 공교롭게도 둘 다 ‘허’씨니 옛말로 부르면 ‘허생’이다.

굳이 특정 운용사, 특정 펀드매니저를 지목한 이유는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운용 스타일이 남다르다. 허 전무는 가치주 투자의 개척자이고, 허 대표는 국내 커버드콜펀드의 원조다. 주식성장형 펀드가 주류인 국내 펀드시장에서 이 둘의 투자 스타일은 비주류다. 그럼에도 설정 이후부터 지금까지 무려 10년간 꾸준히 운용하며 철학을 지켰다. 국내에서 이름이 알려진 펀드 가운데 10년간 꾸준히 운용되고, 펀드매니저도 바뀌지 않은 경우는 두 ‘허생’뿐이다.

그럼 이들이 지켜온 철학은 뭘까. 업계 전문용어로 하면 ‘위험관리’이지만, 일상어로 풀이하면 ‘겸손’이다. 불완전한 인간인 펀드매니저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10년 내내 잊지 않은 것이다. 허 대표는 콜옵션 매도를 통해 주가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를 대비했다. 허 전무는 섣불리 시장을 예상하거나 시장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저평가된 종목은 반드시 가치를 회복한다는 원칙을 꾸준히 지켰다.

조선의 허생이 번 돈은 매점매석이란 옳지 않은 장사방법을 통해서였다. 게다가 본래 뜻했던 공부는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여의도의 두 허생은 10년간 ‘겸손’을 공부했지만, 이룬 성과는 눈여겨볼 만하다. 두 펀드의 설정 이후 누적수익률은 비교지수 대비 2배가 넘는다.

물론 다른 성장형주식펀드의 전략이나 성과가 이들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장이 발전하려면 투자전략에서도 다양성이 필수인데, 두 허생은 이를 몸소 입증했다. 투자를 수익률 게임으로만 전락시키면 국민을 집단도박으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 저축을 대체하는 투자가 되려면 위험이 ‘관리’된 수익추구여야 한다.

미국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겪으며 펀드와 자문형랩 등 간접투자상품에 대한 투자자의 실망이 크다. 하지만 간접투자상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 시장의 간접투자상품 성숙도가 낮은 탓이다. 어찌 보면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다.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여의도의 두 허생과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한다.

흔히 장기투자를 ‘속(臟器)을 다 내놓는 투자’라고 한다. 긴 호흡으로 스스로 결정한 ‘자발적’ 장기투자가 아니라, 투자하다 손실이 나 원금회복을 기다리는 ‘강제적’ 장기투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투자대상에만 계속 두는 게 아니라, 투자활동 자체를 오랜 기간 지속하는 것이 장기투자의 넓은 뜻이다. 그리고 좁게는 위험관리된 상품에 오랜 기간 투자한다는 뜻이다. 두 허생이 걸어온 10년간의 도전은 좁은 뜻의 장기투자에 해당한다. 여의도에 더 많은 허생들이 나타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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