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그림에 빠진 경제학자.."인생2막,미리미리 준비했더니"
라이프| 2012-04-25 16:42
{헤럴드경제= 이영란기자} 은퇴 후 ‘인생 2막’을 어떻게, 무얼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중년이라면 모두 빠져드는 고민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바쁜 일상에 쫓겨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정년을 맞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퇴임 전부터 틈틈이 준비한 덕에 자신만의 ‘꽉 찬 삶’을 영위하고 있는 교수가 있다. 붓을 잡고 화폭을 채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는 노(老) 교수가 있다. 그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딱딱한 경제학자, 감성을 찾아 나서다= 성균관대 경제학과에서 30여년간 미시경제학과 국제경제학을 강의했던 정현식(70) 명예교수는 요즘 화가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정년퇴임(2008년) 무렵부터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해 그룹전에 몇 차례 참여해 오다가, 굴지의 아트페어(A&C아트페어, 주최 ‘미술과 비평’)에 초대돼 단독 부스에서 작품전을 여는 것. 서울 대치동 학여울역의 SETEC에서 5월 1일까지 열리는 이 페어에는 고(故) 백남준 작가를 비롯해 300여 작가의 작품이 나온다.


진주사범학교와 연세대를 거쳐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그는 “30여년간 경제학을 가르치며, 논리를 따져가면서 살았으니 이제는 좀 감성적으로 살고 싶다”고 밝혔다. 

딱딱한 경제학 논리와 수학적 마인드로 무장한채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하며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삶에서 멀어져, 정반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은퇴 후의 삶을 ‘창작활동’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미술 배우기에 돌입했다. 홍익대 미술교육원 등에서 미술의 기초와 유화실기 등을 배웠는데, 고교시절(진주사범) 여학생들과 야외 사생을 갔던 옛 추억이 간간이 떠올라 좋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어린 시절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진주사범에 다닐 때 음악, 무용, 체육 등을 배워야 했는데 나는 미술반을 택해 들로, 산으로 사생을 제법 다녔다”는 그는 그 시절 배웠던 가락이 있어서일까 그림 솜씨가 아마추어라고 하기엔 매우 빼어나다. 미술작업에 대한 열망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끓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휴화산처럼. 그것이 발화돼 신명나는 붓질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까.

정 교수는 “그림은 대하면 대할수록 빨려 들어간다”며 “우리 주위에 그리고 싶은 게 무척 많다. 그림을 그릴 땐 두통도 싹 사라진다”고 했다. 물론 아직도 캔버스에 마주 앉으면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할 때도 많고, 그림이 잘 안 풀릴 때도 많지만, 대상을 열심히 관찰하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며 몰입하는 순간은 말로 표현키 어려운 짜릿함이라고 밝혔다. 


누가 보건 말건, 인정하건 말건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다 보면 해가 지는지 달이 뜨는지도 모를 정도라는 그는 지난 4년간 어느새 150여점에 달하는 유화를 그렸다. 인물화도 있고, 정물이며 풍경도 있는데 그의 곧고 성실한 성정을 닮아 작품들은 구도가 탄탄하고 섬세하면서도 맑은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정 교수는 “주위에서 화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직은 미술학도일 뿐”이라며 똑같은 대상을 그려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을 때 진정한 화가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올해 아내와 나는 고희를 맞는다. 우리 부부의 고희, 특히 아내의 고희를 기념하는 뜻에서 아내의 초상을 그려봤다”며 ’소피아(Sophia)’란 작품을 보여준다. 그 속에선 초로의 한 여성이 수줍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 교수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물을 감성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 좋다. 감성적일수록 일상을 더 큰 감동으로 느끼며 살 수 있다”며 “당연한 것으로 지나칠 수 있는 대상에서조차 새로운 느낌을 받고 감동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내 외에도 자녀, 손자손녀 등 주위 가까운 사람들을 즐겨 그린다. 비 내리는 거리에서 자기 몸보다 더 큰 우산을 받쳐든 채 뒤뚱뒤뚱 걷는 어린 아이(손녀)를 그린 그림은 구도도 근사하고, 어린이의 표정이 생생해 몹시 사랑스럽다. 삶의 한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 이를 유려하게 표현한 그림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유화지만 기름기를 뺀, 담백하면서도 격조있는 그림이란 점에서 정 교수의 감춰진 역량을 엿보게 한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정 교수는 ‘미시경제학’ 등의 전공서적 외에 투안(Thuan) 대주교의 저서 ‘희망의 길’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요즘 들어 환경규제와 국제무역 및 산업구조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으로, 화가로써 인생의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즐겁게 직조하는 그는 묵직한 그림들을 가뿐히 들곤 “이제 그림을 완성하러 가야 한다”며 나섰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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