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흔들리면서도 꿋꿋한…유럽정치의 비밀
뉴스종합| 2012-05-10 10:34
그리스 대통령은 없다?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헌정체제
의회다수당 총재인 총리가 실권
대통령 권한은 갈수록 줄어들어

의원내각제 다수 분포
양당제 아닌 다당제 운영시스템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성향 수용
과반정당 없이 공동정부 형태로

힘있는 대통령도 있다
프랑스 대통령이 외교·국방 전권
총리는 경제·복지로 ‘이원집정제’
다당제와 한살림…협상의 미학도


“전 정권이 유럽연합(EU) 등과 약속한 재정 긴축 정책을 폐기하겠다.” 8일 오후(현지시간) 그리스 의회 제2당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재는 아테네 대통령궁을 나섰다.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과의 면담이 끝난 직후였다. 38세의 젊은 그리스 정치인은 거침이 없었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탈퇴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EU 주요 지도자들은 오는 23일 비공식 정상회의를 열고 그리스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최근 총선을 실시했으나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한 그리스에 유로존과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정부가 집권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국회의원선거를 하더니 이번엔 의회 1당도 아닌 2당이 정부 구성을 하겠단다. 발칸 반도의 남쪽 끝을 차지한, 남한보다 작은 나라 그리스에 총선 재선거설이 파다하다. 그럼 그 나라 대통령은 뭐 하는 사람이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공화국’이 뭐지?= 이 같은 혼란은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공화국’이라는 그리스의 독특한 헌정 체제에서 비롯됐다. 대통령의 권력 전횡을 막기 위해 단행한 1975년 3차 헌법 개정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시간이 갈수록 축소됐다. 시민이 국회의원 300명을 뽑고,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표결로 선출되는 명예직에 가깝다. 의회 다수당 총재인 총리가 실권을 쥐고 있다. 정부 구성권한도 당연히 총리가 갖는다. 그런데 총선 직후 원내 다수 의석을 가진 1당이 사흘간 정부 구성 협상에 실패하면 2당이 다음 사흘간 정부 구성권을 갖는다. 현재 1당인 신민당은 불과 6시간 만에 “이처럼 중요한 국면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며 정부 구성 실패를 자인했다. 그리스의 원내 2당이 된 급진좌파연합의 치프라스 총재의 말 한 마디가 ECB를 움직일 정도로 후폭풍을 갖는 건 그가 차기 정부 구성의 열쇠를 ‘사흘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실패할 경우 제3당인 사회당(PASOK)이 바통을 이어받고 끝끝내 정부 구성을 하지 못하면 2차 총선을 치러야 한다.

그리스 헌법이 이런 장치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양당제가 확립되지 못한 정치문화 때문이다. 그간 어떤 정당도 의회 과반을 못 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국무총리 중심의 의원내각제를 유지하기 위해 성향이 비슷한 원내 다수당끼리 ‘쪽수’를 합쳐 절반을 넘긴다. ‘연정 (聯政ㆍ연립정부)’이 그래서 구성된다. 일종의 공동 정부다. 그리스의 표어 ‘자유냐 죽음이냐(엘레프테리아 이 타나토스)’가 말해주듯, 정치적 자유를 향한 시민의 의사가 다양하고도 복잡한 것이 그리스 정치문화의 실체다. 


▶유럽은 의원내각제가 대세= 이처럼 다양성이 존중되는 정치문화는 그리스에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긴축 기조의 유지’를 둘러싸고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주문하다 집권여당이 권좌에서 물러난 나라 대부분이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2011년 6월에 정권이 바뀐 포르투갈 또한 1976년 민주화의 길을 튼 이후 ‘대통령제가 가미된 의원내각제’ 헌법하에서 다양한 성향의 정당이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의 경우 1975년 프랑코의 군부정권이 무너진 이후 왕정이 다시 들어섰지만 수많은 정당이 출현해 부침을 반복하고 있다. 이 나라 또한 2011년 11월 사파테로 총리가 물러나면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탈리아는 20세기 초반부터 수준 높은 정치문화가 자리 잡았다. 비록 교사 출신의 무솔리니가 ‘두체(최고통치자)’를 자처하며 독재를 일삼은 과거가 있지만 이 나라 또한 대체로 시민의 정치 성향이 꽤 폭넓다. 역시 의원내각제 중심의 헌정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으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스페인의 사파테로와 함께 나란히 권좌에서 물러났다.

▶‘힘 있는 대통령’도 있다= 그렇다고 유럽에 ‘힘없는 대통령’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다르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이번에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1981년 7년 단임으로 물러난 지스카르 데스텡에 이어 31년 만에 단임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강력한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한다. 1958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의 ‘제5공화국’을 떠받치고 있는 헌법은 1987년 이후 한국 헌법(제6공화국)이 거의 그대로 차용했을 정도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에서 전권을 행사한다.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 국회에서 총리는 하원 다수당의 총수가 맡는다. 총리는 주로 경제 및 사회ㆍ복지 등을 책임진다. 이른바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다. 만약 총리와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를 땐 어찌 될까. 물론 그런 경우도 발생한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중도우파,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사회당 소속이었다. 이른바 ‘동거정부’가 결성됐다. 혼란이 불 보듯 뻔했으리라 예상되지만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가브리엘 A 알몬드를 비롯한 유명 정치학자들이 “프랑스 정치는 예술에 가깝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과 두 집이 한살림을 하는 상황을 ‘예술적인’ 협상과 타협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이다. 물론 프랑스 또한 크고 작은 정당들이 오밀조밀 모인 다당제로 운영되고 있다.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립정부를 보면서 마치 ‘제왕 같은 대통령’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유럽의 민주주의는 쇠락하지 않았다. 타락하지도 않았다. 어디처럼 “후퇴했다”는 평가도 별로 없다. 시민의식이 갖춰진 수준 높은 정치문화만이 제대로 된 의원내각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물론 최근 2~3년 사이 “빵 안 내놓으면 물러가라” 또는 “재정 적자 모르겠다. 일단 살고 보자”식의 분위기가 유럽 대륙을 휩쓸면서 정치적 신념이나 문화보다는 경제적 이유가 정권 평가의 1순위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위태해 보이면서도 순조롭게 유지되는 게 바로 유럽의 정치다. 그리고 그들 특유의 시스템이다.

윤현종 기자/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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