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현실을 거슬러…운명을 바꾸다
뉴스종합| 2012-05-31 11:49
수재였던 형님, 학교 폭력에 희생당한 탓에 부모님이 초등학교도 안 보내려해…중학교도 어머니 졸라가며 마쳤지

천생 어머니의 친화력 빼닮아 누구든 20분만 주면 내 사람 만들 수 있어…고객들 부자로 만들다 보니 꼴찌지점 1등 올려놓고 ‘영업 달인’ 인정받아

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첫 직장에 불만…연봉 줄더라도 더 큰 조직으로 가자며 국민은행으로 옮긴지 어느새 30년

제갈량의 출사표처럼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말단행원서 행장에 오르기까지 내 마음 속 좌우명


‘한국을 대표하는 은행의 CEO라면, 은수저 하나쯤 물고 나왔거나, 고향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재였을 테지. 그 흔한 배경 하나 없이 사다리를 정복하는 것이 요즘 세태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여의도 본점 집무실 한 켠에서 민병덕(58) KB국민은행장을 기다리던 기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5월 하순의 이른 더위와 다투고 있었다. 채 5분이 지나기 전에 동년배보다 10㎝는 더 커보이는 그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남들 다 가는 초등학교 문턱을 넘기 위해 아버지를 무던히도 졸라야 했어요. 중등교육을 받으려고 사흘간 잠을 자지 않고 어머니와 싸웠죠. 우골탑 걱정에 자원해서 군대를 갔고,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손주를 안겨드리려고 대학 4학년 때 결혼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첫 직장도 국민은행이 아니었어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민 행장은 지난날들을 술술 풀어냈다.

보기 좋게 빗나간 예측. 알고봤더니 그는 현대사의 질곡이 초상으로 박힌 전후(戰後)세대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신산을 겪은 ‘베이비부머’의 원조 격이었다. 흔한 말로 개천에서 용 난 ‘천연기념물’과 마주 앉은 기자는 자세를 고쳐잡고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성공한 사람에겐 항상 인생의 스승이 있다죠.

▶어머니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엄마교 신자’로 부른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어요. 어머니는 배우질 못하셨어요. 야학으로 한글을 읽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모르는 사람과도 이내 친해지는 친화력이 뛰어났습니다. 내가 ‘영업통’으로 유명한데, 어머니 성격을 타고 났어요. 누구라도 내게 20분만 주면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먹는 그릇에 밥을 내주는 인정도 있고, 화가 나면 멱살잡이도 마다 않는 배짱과 강단이 있으셨죠. 제가 영업을 하면서 추진력 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원동력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이 왜 아들을 학교에 안 보내려고 하셨나요.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위로 형님 한 분이 계셨어요. 머리가 명석하고 지역 수재로 소문나 집에서도 서울대를 보내려고 했어요. 아마 살아있었다면 갔겠죠. 그런데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형이 요즘 말로 학교 폭력 때문에 중학 3년 때 돌아가셨어요. (그는 형님 복수를 하겠다며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고, 4단의 고수가 됐다.) 그 충격으로 상심한 부모님이 둘째인 저를 아예 학교에 안 보내겠다고 마음 먹으신 겁니다. 제가 그때 왜 그랬는지 엄청 고집을 부렸어요. 나도 학교 가고 싶다고. 만약 그때 부모님 말을 듣고 눌러 앉았으면 제 운명은 달라졌겠죠. 

시골의 가난한 소년에서 고비 때마다 도전적으로 인생 행로를 개척해 은행 CEO까지 오른 민병덕 KB국민은행장이 여의도 본사의 옥외 발코니에서 미래를 응시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그 이후로는 순탄했겠습니다.

▶아니에요. 초등학교 졸업 후에 어머니가 느닷없이 저를 공주에 있는 한 암자로 보냈습니다. 절에 가면 아들의 명이 길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1년반 정도 그렇게 절밥을 먹다가 기관지가 안 좋아서 집으로 잠시 왔죠. 집에 와서 보니 교복을 차려입은 친구들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잠도 자지 않고 어머니를 졸랐죠. 그래서 찾아간 것이 종로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이었어요. 쌀 두 말을 가지고 갔는데 그때 과장급 책임자가 돈이 많이 든다며 시골로 돌려보냈어요. 그래서 고향에 내려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됐습니다. 이후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공부하러 서울로 오게 됐죠. 

-공부에 한이 맺힐 법도 합니다.

▶하하. 시대 상황이… 74학번이라 줄곧 데모를 했고, 향토장학금으로 다녀야 했기에 자원해서 군대를 갔죠. 복학 후에는 취업공부만 열심히 했어요. 결혼도 대학 4학년 때 했습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빨리 손주를 안겨드릴 마음이 컸습니다. (그는 부친이 48세에 본 늦둥이였다) 캠퍼스 생활만 놓고 보면 재미가 없었어요. 하하.

-사회에 진출해서는 잘나가던 회사를 등지고 봉급이 적은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당시 잘나가던 한국투자신탁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일을 잘 가르쳐주지 않는 겁니다. (그는 수석 입사했다). 봉급만 많으면 뭐하냐는 생각을 했어요. 조직이 큰 곳으로 가보자 생각했고, 국민은행을 선택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된 결정이었어요. 81년 입행 이후 만 30년이 지났네요.

-민 행장에게는 ‘영업통’이라는 훈장이 꼬리표처럼 붙습니다.   

▶처음에 발령받은 초임지가 도봉지점입니다. 당시 지점장은 일밖에 모르는 엄하신 분이셨는데 그분한테 일을 배워 동기들 중 선두주자가 됐습니다. 그러다 인사부서를 거쳐 실적이 부진한 송탄지점장으로 나갔죠. 그 지역의 공장이나 회사를 주말도 없이 헤매고 다녔습니다. 골프도 칠 줄 모르면서 사람들을 만나려고 연습장을 3군데나 돌아다녔어요.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편지도 쓰고, 아이들에게 장난감 선물 공세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월급을 집에 가져갈 수 없었다.) 어머니의 친화력과 배짱을 물려받은 거죠. 저는 지금도 고객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데 그치지 말고 고객을 부자로 만들라고 말합니다. 우리와 거래하면 부자가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죠. 충무로지점장 때 주고객층인 임대회사 CEO들에게 대출을 해주고 건물을 사라고 했는데 그때 부자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야 관계가 오래갑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꼴지 지점이 어느새 1등이 됐고 회사에서도 ‘영업의 달인’으로 인정해줬죠. (그는 2007년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본부장 자리에 오른다.) 


-위기는 없었나요.

▶왜요, 저도 한때 은행을 그만둘까 생각도 했죠. 인사부서에 근무하면서 윗사람들에게 찍힌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 튀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묵묵히 영업 일에 전념했어요. 나중에는 오해도 풀리고 지금에 와서는 행장 업무를 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행장 취임 후에는 3000여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난 것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행장이 되고 보니 직원 수가 다른 은행보다 1만여명이나 더 많은 겁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지점장과 직원 대표들을 모아놓고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죠. 그래서 노조합의하에 원만하게 명예퇴직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인연을 각별히 여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군 생활 때 만난 대대장이 있었습니다. 대령으로 예편해서 지금은 79세의 고령이십니다. 그분이 하루는 소대장을 혼내는 데, 집합한 부대원들을 먼저 뒤로 돌려세운 후에 잘못을 꾸짖는 겁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지휘관의 명예를 깎아내릴 수 없다는 배려였습니다. 그분의 리더십에 많이 공감했고, 이후 제가 직장상사가 됐을 때 칭찬은 공개적으로, 질책은 가급적 따로 불러서 하는 게 몸에 뱄습니다. 행장이 된 후에 너무 감사한 마음에 수소문했고 결국 그분을 모시고 옛 부대를 다시 찾았습니다. 후배 부대원들이 ‘왕의 귀환’이라며 대환영을 해줬고, 우리 두 사람에게는 좋은 추억이 됐습니다.   

-말단 행원에서 행장이 되기까지는 마음속 좌우명도 있었겠죠.

▶‘鞠躬盡瘁, 死而後已(국궁진췌, 사이후이-삼가 힘을 다해 쓰러질 때까지 충성하며 죽음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그치겠다)’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제가 행장이 되면서 화두로 던진 말이기도 합니다. 앞만 보고 달린 제 인생과 닮아서 특히 좋아합니다.

-아직도 이룰 게 남아 있습니까.

▶최고 자리까지 올랐는데 개인적인 욕심이 더 있겠습니까. 뜻하지 않은 구조조정 후에 직원들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해보자는 의지로 충천한 데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작년부터 수익도 많이 나고 대외적으로 고객만족 조사에서 6년 연속 1위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이제 행장으로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리딩뱅크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 고객들에게 신뢰받는 은행이 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신뢰 하면 KB를 떠올리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겁니다.

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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