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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 ’마더 테레사 센터’ 자원봉사 참가기
라이프| 2012-07-20 06:44
【콜카타(인도)=이해준】힌두교 최대 성지인 바라나시에서 콜카타로 가는 길은 한없는 기다림과 덜컹거림의 연속이었다. 오후 7시15분 출발 예정이었던 기차는 무려 8시간이나 연착해 다음날 새벽 3시에 역에 들어왔다. 그 기차는 20시간 이상 달려 한밤중에 우리를 콜카타에 내려 주었다. 모두 녹초가 되었지만, 인도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콜카타에서 하루를 쉰 다음 바로 ‘테레사 센터’로 알려진 사랑의 선교회 마더스 하우스(Mother’s House)를 찾았다. ‘살아 있는 성녀(聖女)’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한 테레사 수녀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보고, 봉사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였다.

테레사센터에서의 봉사활동은 오전 7시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빵과 과일(바나나), 짜이(밀크티)로 이뤄진 ‘테레사의 아침식사(Teresa’s Breakfast)’로 시작됐다. 테레사 수녀가 평소에 먹었던 식단이다. 소박했지만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 만족스러웠고 꿀맛 같았다. 아이들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먹었다.
향후 일정을 소개하고 봉사를 마치는 사람을 환송하는 간단한 행사를 치른 다음, 그룹 별 활동 현장으로 이동했다. 봉사 현장은 모두 7곳이 있었다. 필자 가족은 장애우들이 있는 다야단(Dayadan)에 배정돼 버스와 오토릭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다야단에 도착해 보니 1층에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장애의 어린이들이, 필자 가족이 봉사활동을 한 2층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4~13세 사이의 장애우 34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부분 돌보는 사람이 없이 거리에 버려져 있던 아이들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외국인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아이들 돌보기든, 빨래든, 청소든,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며 싱긋이 웃을 뿐이었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각각 한명씩 맡아, 손을 맞잡기도 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콜카타의 마더스 하우스 1층에 안치된 테레사 수녀의 묘지에 참배객들이 꽃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두 아들 창희와 동희, 조카 승희는 시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빨래를 도와주려 옥상으로 올라갔다. 역시 아이들의 적응력과 순발력이 빨랐다. 한국에서도 장애우 봉사 경험이 있는 아내도 곧 익숙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마비되어 잘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의 손발을 조심스럽게 주물러 주면서 아이와 교감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주물러주자 아이가 갑자기 아내를 와락 껴안았다. 소통과 봉사활동의 진한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필자도 한 아이를 맡아 이름을 부르며 손발을 주물러 주고,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주기도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피부병인 듯도 하고, 심한 아토피 같기도 한 딱정이들이 손과 발에 잔뜩 나 있었다. 이 또래 아이의 피부 같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첫 날은 활동 적응의 시간이었고, 둘째 날 다야단에 도착하니 할 일이 엄청 많았다. 특히 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바로 전날이 봉사활동이 없던 날(매주 목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3층 옥상으로 올라가 팔을 걷어부쳤다. 힘을 쓸 때가 온 것이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은 세제를 넣은 통에 빨래를 집어넣고 발로 꾹꾹 밟아 세탁을 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물에 헹구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비틀어 짜고, 또 다른 사람은 빼곡하게 걸려 있는 빨랫줄에 널었다. 해야 할 일이 보이면 서로 달려들어 자연스레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가득찬 옥상 빨랫줄이 마음을 충만하게 해 주었다.

필자 가족은 외국인 봉사자과 인도인들로 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한 가족이 봉사에 나선 자체가 이례적인 데다, 특히 대학생인 큰 아들 창희를 비롯한 아이들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었다. 인도인 아줌마들은 아이들에게 “브라더! 브라더!”하며 이것저것 부탁을 했고, 아이들은 "오우~케이~” 하며 더 열심히 달려들었다. 신이 났다.
노란색 간판 왼쪽 건물이 테레사 수녀가 활동했던 곳에 세워진 마더스 하우스 입구. 그녀의 묘지도 그곳 1층에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아침 7시 이 건물 1층에 모여 ‘테레사의 아침식사’를 함께 한 다음 봉사현장으로 출발한다.

셋째 날에도 빨래가 많았다. 장애우 시설이다 보니 그랬다. 다행히 자원봉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햇볕과 바람이 좋아 하루 만에 빨래들이 바싹 말랐다. 이 후 옥상까지 물 청소를 했다. 두껍게 쌓여 있던 먼지와 오래된 때를 싹싹 닦아내니 기분도 상쾌해 졌다.

10시 30분이 넘어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차를 한 잔씩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곳에는 필자 가족과 일본인 3명, 이탈리아인 부부, 프랑스인 등 10여명이 함께 봉사 활동을 했다. 일본에서 온 고등학생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혼자서 왔다고 했다. 기업인, 교사 등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학생이 대견해 보였다.

장애우들의 점심식사가 시작됐다. 봉사자들이 1명씩 맡아 식사를 도와주었다. 대부분 생각보다 왕성하게 식사를 했다. 입에 넣어주자 마자 꿀꺽꿀꺽 삼키고는 다시 입을 쩍 벌렸다. 오랫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데 따른 정신적 상처가 식욕을 더 강하게 자극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더 ’짠’ 해 졌다.

필자가 배식을 맡은 아이는 식사를 잘해 수월하게 마쳤지만, 둘째 아들 동희의 아이는 계속 잠만 자려고 했다. 죽을 뜬 수저를 입가에 가져가서는 “좋아요~ 좋아요(Ok~ Ok~)”하며 식사를 유도하려 정성을 다했다. 평소의 덜렁거림이 없었다. 눈빛도 달랐다. 아이의 식사를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다.

창희와 중학생인 조카 승희도 맡은 아이에 집중했다. 눈빛에 진지함과 간절함이 넘쳤다. 평소 컴퓨터 게임 등 흥미거리에 몰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먹이고, 입 주변을 깨끗이 닦아준 다음 아이들을 안아 침대로 옮겼다. 이 때에도 그들은 자신이 맡은 아이에 집중했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동작과 표정을 살피고, 무얼 원하는지를 읽으려 했다.

필자 가족은 당초 1주일 동안 봉사활동을 할 예정으로 콜카타에 8일간 머물렀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실제 봉사활동을 3일로 그쳐야 했다. 막 익숙해졌을 때 떠나야만 했던 아쉽운 ‘맛보기 봉사활동’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뿌듯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장애우 시설인 ’다야단’ 인근의 모습. 낡은 건물과 짐을 가득 실은 리어커 등이 이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처음에는 수용된 아이들이 안타깝고 딱하게 보여 착잡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빨래를 하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발의 꿈틀거림과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주무르기도 하고, 흘리는 침을 닦아주면서 마음이 서서히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무겁기만 하던 마음도 가벼워지고 따뜻해졌다.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돕는 시간이었으며, 성찰의 시간이었다.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는 훈련이기도 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며 소홀히 했던 ‘주변’을 돌아보는 방법도 배웠다. 우리가 봉사한 것 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

1910년 동유럽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마더 테레사. 18세 때 수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아일랜드의 수녀원을 거쳐 멀리 인도로 넘어와 1997년 서거할 때까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성녀. 테레사가 80여년 전 콜카타 빈민가로 들어갈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 그곳은 전세계 자원봉사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오는 기적의 현장이었다.

마지막날 돌아본 마더스 하우스 2층의 성당 입구엔 바람이 훅 불면 쓰러질 것 같은 비쩍 마른 테레사의 조각이 있었다. 인도 전통복장을 개조해 직접 만든 무명천 사리(Sari)를 입은 그녀는 한없이 가냘퍼 보였다. 하지만 세계를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울림을 던지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마더 테레사는 우리 가슴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이해준 기자/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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