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재독화가 차우희 "겸재는 세잔을 뛰어넘는 거장"
라이프| 2012-08-22 15:33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겸재 정선은 프랑스 화가 세잔을 뛰어넘는 천재적인 작가입니다. 서양의 근현대미술가와 평론가들이 마치 신(神)처럼 떠받드는 세잔이 시도했던 조형실험, 회화실험을 겸재는 그보다 100년도 전에 시행했으니까요. 겸재가 바위, 산, 나무를 그리며 시도한 기법은 세잔의 작품 ‘생 빅투아르산’의 기법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겸재라는 천재가 있음으로 해서, 그가 창안한 진경산수가 있음으로 해서 오늘 우리 현대미술은 이만큼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작가로 겸재에 오마주를 바치지 않을 수 없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 너나없이 중국 그림을 본뜨던 시절, 겸재는 우리 고유의 미감이 담긴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우리의 주체성을 살려 그린 그의 진경산수화는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작업하는 차우희(67)가 겸재에 대해 오마주를 바친 작업들을 선보인다.

차우희 화백은 베를린을 떠나 서울에 오면 서촌(효자동)에 머물며 작업한다. 서울 서촌은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살던 지역. 겸재는 75세 되던 해 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을 묵직한 농묵으로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 그림,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는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인왕산 바위와 낮게 깔린 구름을 중량감 넘치면서도 대담하게 표현한 그림은 오늘 봐도 세련되고 멋스럽다.
차우희는 근래들어 겸재의 이 걸작에 헌정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인왕산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고 있던 터였기에 작업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제가 서울에 오면 머무는 효자동 집 옥상에 올라가면 인왕산과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산들은 우리로 하여금 찬찬히 그 모습을 관조하게 하죠. 독일과 프랑스의 산들은 대체로 사람을 포근히 안아주는데 비해 한국의 산은 바라보게 합니다. 바라보게 하는 산은 작가에게 큰 영감을 주죠"

인왕산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차우희의 그림엔 실경(實景)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차우희만의 추상적 언어들이 가득하다. ‘Homage to JungSun(오마주 투 정선’이라 명명된 작품을 위해 작가는 여러 겹의 천을 손바느질로 일일이 이어붙여 콜라주한 뒤, 캔버스에 올렸다. 그리곤 그 위에 유화 물감을 여러 번 얇게 덧바르며 추상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작가의 사색과 끈기가 은은히 배어 있다. 

이들 신작을 모아 차우희는 8월 30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 이태원동의 표갤러리(대표 표미선)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에느 조선의 천재화가 겸재에 대한 예찬을 담아낸 대작 회화 20점 등 총 30여점이 나온다. 또 산의 등선을 하나의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입체작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차우희는 오랫동안 ‘여행’이라는 테마를 갖고 작업했다. 1990년대초 ‘오딧세이의 배’, 1990년대 ‘Stray Thought on Sails’, 2000년대 ‘Sail as Wing’을 발표했던 그는 이번에는 도심 인왕산을 그만의 독자적 예술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물처럼 ‘무’에 가까운 백색이 주를 이뤄왔다. 거기에 알쏭달쏭한 검은 면들과 숫자, 알파벳이 더해진다. 수학기호, 또는 기하학적 면을 연상케 하는 차우희의 이 기표들은 작가가 일상 중에 만난 특정장소나 인물, 시간을 가리킨다. 비밀스런 상징언어인 셈.
작가는 이 기표들의 조합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드로잉을 거듭한다. 즉흥적으로 그려넣거나 부착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의도하는 조형성과 기표가 하나로 부합됐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기표를 그 자리에 자리잡게 한다. 

차우희는 그간 흑과 백으로만 이뤄진 그림을 그려왔다. 이는 화폭에 오로지 ‘정신의 세계’만 남길 바라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근작에선 백색과 함께 땅(흙)의 색조가 여리게 반영돼 작업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가 표현한 인왕산의 흙빛은 마치 콩땜을 한 온돌장판처럼 발그레한 노란빛이어서 우리에겐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의 체취로 길이 들어 윤기가 나는 노란 장판처럼 차우희의 근작들은 분명 추상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지니며 이 땅의 산하(山河)와 지난 역사, 그리고 지나간 사람들을 보듬고 있다.

1981년 독일로 이주해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차우희는 한국, 일본, 독일의 미술관 등에서 30여회의 개인전을 열어왔다. DAAD 베를린예술가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20여년간 독일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했던 그는 베를린의 노펠퍼 갤러리, 헤어레스 베카라리 등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02)543-7337 사진제공 표갤러리.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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