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근현대사의 문화심장부
문인들간 예술 논한 대표적 아지트
이봉구·김수영 등 발자취 고스란히
서울 명동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시기 내내 이 땅의 문화적 심장부였다. 그 시작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다.
당시 일제가 충무로1ㆍ2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일본인들의 거주지였던 인근 명동 역시 충무로를 닮아갔다. 식당과 주점, 다방이 늘어났고 명동은 번화가로 변모했다.
해방 전후 지성에 목마른 우울한 문인들은 명동에서 차 한잔, 술 한잔에 기대어 예술과 인생을 논했다.
주머니 가벼운 문인들에게 있어 명동은 자존을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이자, 사교의 장이었다. 전후에도 명동은 허물어진 국토 위에서 예술을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성이었다.
피난지로 흩어졌던 문인들도 환도 후 자연스레 다시 무너진 명동의 밤거리로 모여들었다. 동방문화회관 1층의 다방 ‘동방싸롱’과 유네스코회관 맞은편 골목의 주점 ‘은성’, 다방 ‘모나리자’ ‘돌체’ 등은 이들의 대표적인 아지트였다. 명동은 방황하던 문인들의 귀착지로서 절망을 낭만으로 감쌌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명동에서 수많은 예술인과 교류하며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명동백작’ 이봉구를 비롯해 김수영, 박인환, 천상병, 조지훈, 조병화 등 한시대를 풍미한 숱한 문인이 명동에 발자취를 남겼다. 선약이 없어도 명동에 가면 누구든지 찾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명동에서 무시로 어울렸다. 원고 청탁과 집필, 원고료 지급, 출판기념회도 모두 이곳에서 이뤄졌다. 전혜린은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 넣기 전날 밤, 생애 마지막 잔을 명동에서 ‘명동백작’과 기울였다.
1974년 명동 문화의 상징이었던 국립극장이 상업건물로 바뀌면서 문인들도 인사동과 안국동으로 흩어졌다.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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