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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병이 깨진다
뉴스종합| 2012-10-02 11:28
서민들 스트레스 대상 전락
2008년 1억9000여개 병 증발
갈수록 빈병 회수율 감소


‘키 215㎜, 몸무게 290g, 허리둘레 204.1㎜.’ 내 신체 치수다. 처음 세상에 나온 게 1924년이니 나이는 88세. 피부색은 애초 갈색이었다가 흰색, 초록색으로 변해왔다.

나는 소주병이다. 추석명절 기간에도 엄청 사랑을 받은 나는, 우여곡절 많은 사람들 삶처럼 인생 역정이 간단치 않다.

시작은 화려하다. 당대 최고의 섹시댄스 여가수 이효리가 5년째 날 잡고 흔들어주고, 미모의 여배우 문채원도 밤새 내 곁을 지켜줄 것처럼 TV에서 말한다.

문제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내 안에 담긴 소주가 빚어내는 촌극이 비극적 결말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웬 비극적 결말? 난 지금 ‘부활’, 사람들 말로는 ‘나의 재사용’에 관한 얘길 하는 중이다. 내 몸값(소주병)은 130원 정도다. 소주가 채워지면 1000원 안팎에 사람 손에 쥐어진다. 가격만 봐도 ‘서민의 벗’이다. 

기쁨의 잔을 돌리는 순간을 함께하는 건 나도 즐겁다. 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서민들 탄식의 안주로 쓰일 땐 잔뜩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담배꽁초가 들어오는 건 양반이다. 날 깨고 부수는 사람들을 만나는 날엔 시쳇말로 내 인생 ‘종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조마조마한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불안한 경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상 최대의 불황과 실업이 많은 사람들의 울화통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나를 학대하게 만든다는 얘기도 있다. 나에 관한 인구센서스 혹은 족보쯤 되는 수치(한국용기순환협회 집계)를 보면 이런 진단은 일리 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세계 경제가 휘청이던 2008년, 나는 무려 31억5285만1584개나 만들어졌다. 전년보다 1억7000여만개, 이듬해보다 2억3000여만개 많았던 것이다. 국가경제와 가계가 팍팍해질수록 나와 소주는 세상과 조우할 일이 많아지는 셈이다.

2008년 한 해, 인간 군상을 돌고 돌아 ‘부활’을 위해 회수된 나의 숫자는 29억5623만8410개다. 1억9661만3174개가 증발했다. 회수율로는 93.8%. 집계가 시작된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통틀어 최저 수준이다.

이런 상황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채무위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지난해에도 비슷했다. 30억개 이상 만들어졌지만 회수된 건 28억여개(회수율 94.3%)에 지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생김새에 DNA도 유리로 동일한 맥주병이나 청량음료병의 회수율은 98~99%에 달한다.

술이 ‘웬수’라고 했던가. 맥주보다 독한 술인 소주를 마신 사람들은 무슨 스트레스를 그렇게 많이 받고 사는지 울다 웃다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나를 집어던지거나 목 부위를 깨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몰골이 엉망인 채로 회수되면 다시 내 몸에 소주를 담을 수 있기까지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온전하게 ‘부활’하면 10번은 쓸 수 있는데…. 처지가 이렇다 보니 맥주병과 비교할 때면 내 인생이 박복한 것만 같다. 

불황 탓에 사람들이 요즘 나를 비롯한 많은 빈병을 대형마트 등에 설치된 빈병보증금환불센터에 내놓는다고 한다. 나를 빈병인 채로 돌려주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40원씩 돌아가기 때문에 살림살이 어려워진 이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해외 선진국의 빈병 재사용률은 90%를 넘었는데 우리나라는 고작 85% 선에 불과해서다. 경제가 암울하다. 또 언제 누굴 만나서 상처받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난 늘 아프다.

<홍성원 기자>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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