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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 ‘피의 숙청’으로 30년 절대 권력…習 미소뒤 감춘 ‘비수’ 어디로
뉴스종합| 2012-11-02 11:48

1세대-2세대의 이념대결
마오, 류샤오치와 20년 이념투쟁
덩샤오핑 부주석때 마오세력 제거

2세대-3세대의 정책대결
톈안먼사태후 鄧 심복들 잇단 실각
인적구성 변화시도로 유혈충돌 자제

3세대-4세대의 제도화
경제발전따라 국내정치 안정 최우선
依法執政 방침…집단지도체제 완성


“중국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인민은 일어섰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하 마오)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에 올라 선언한 건국일성이다. 그가 말했던 ‘중국의 새 역사’는 바로 유일 정당으로 군림한 중국 공산당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는 ‘이념 대결→정책 대결→제도화’의 길을 거쳐 ‘평화적 정권이양’에 근접한 공산당 권력교체의 과정이기도 했다.

중국의 권력승계 시스템은 세대별로 최고지도부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진화했다. <중국 지도부의 세대 구분 및 세대별 세부 사항은 본지 10월 9일자 31면 ‘中 금단의 땅’ 중난하이로 가는 길’ 참조>

▶1세대(마오쩌둥)~2세대(덩샤오핑), 이념 대결=퓰리처상을 받은 세계적인 중국 저술가 해리슨 E 솔즈베리는 마오를 ‘새로운 황제’라고 기록했다. 그의 권위는 신성불가침이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1958년 중난하이에 있는 자신의 거처 바로 옆에 온수 실내수영장을 짓기도 했다. 같은 해 시작된 ‘대약진운동’도 “15년 내 영국 경제를 따라잡겠다”는 마오의 말 한 마디로 전개됐다. 결국 지나치게 이상적인 계획과 목표로 이 운동은 실패했다. 대기근이 겹쳐 최소 3000만명 이상이 숨진 것도 그 시기였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은 20년 가까이 이념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 사상’, 즉 농촌혁명과 대중운동 중심의 공산주의 이념이 약점을 드러냈고, 마오도 잠시 당권을 내려놨다. 그 사이 마오쩌둥의 2인자로 지목됐던 류샤오치(劉少奇)가 주석직에 올라 마오를 강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1966년 홍위병(청년층이 중심이 된 마오쩌둥 추종 세력) 등 배후 조직을 통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일으키고 실권을 회복했다. 류샤오치는 자본주의를 신봉한다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실각한 뒤 고문 끝에 옥사했다. 마오쩌둥의 ‘4인자’이자 류샤오치 세력으로 분류됐던 덩샤오핑(이하 덩)도 이때 박해를 당했다.

이후 덩은 부주석으로 복권한 뒤 문혁 세력 척결에 나섰다.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의 조직은 문혁을 기획한 핵심 그룹으로 분류됐다. 결국 덩은 1976년 마오의 사망 직후 쿠데타를 일으켜 장칭을 숙청하고 이듬해 공산당 1인자에 올랐다.
 

중난하이는 1949년 이후 역대 중국 최고지도부의 거주지였다. 지금도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다. 정문 위에 쓰인 현판의 ‘신화(新華)’는 ‘새로운 중국’이란 뜻이다. 그리고 중앙에 보이는 다섯 글자는 ‘웨이런민푸우(爲人民服務)’로, ‘인민을 위해 일한다’는 의미다. 이번 18차 당대회를 통해 등장할 새 지도부가 새로운 중국의 문을 열고 어떤 방식으로 ‘인민을 위한 10년’을 맞이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헤럴드경제 DB]

▶2세대(덩샤오핑)~3세대(장쩌민), 정책 대결= 덩도 마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황제’로 불렸다. 집권 내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 만큼 당권을 둘러싼 마찰도 있었다. 이는 주로 혁명 원로들과 덩의 대결이었다. 이들은 한창 추진 중이던 개혁ㆍ개방의 속도 조절 등 정책 시행을 놓고 보수파와 개혁파로 갈라졌다. 1988년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이들은 정면충돌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87년 후야오방(胡耀邦)이, 1989년 톈안먼 사태 여파로 자오쯔양(趙紫陽)이 실각하는 등 덩의 정책 실무를 담당했던 심복들이 보수파에 의해 연이어 물러났다. 그러나 덩은 마오 시대의 교훈에 따라 유혈충돌을 자제했다. 대신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왔다. “개혁ㆍ개방이 속도를 내려면 젊고 전문지식을 갖춘 간부들이 필요하다”며 당 지도부의 인적 구성 변화를 시도했다. 이에 따라 당 지도부의 퇴임 연령이 비공식적으로 낮아졌다. 원로 등 보수파는 자동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동시에 덩은 1989년 이후 장쩌민(이하 장), 주룽지(朱鎔基) 등을 기용해 3세대로의 권력이양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3세대(장쩌민)~4세대(후진타오), 제도화=장은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내 정치의 안정을 우선시했다. 이는 ‘법제화’ 움직임으로 현실화됐다. 1997년 장은 ‘법에 의한 국가통치(依法執政)’ 방침을 확정했다. 이처럼 국가의 모든 분야가 법제화되면서 4세대로의 권력승계 작업도 이를 따랐다. 공산당ㆍ정부ㆍ의회 등 권력기관 간 역할이 분담됐다. 이에 따라 공산당 서열 1위인 국가주석도 후순위에 있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한국의 국회의장 격)이나 국무원 총리의 권리와 직능을 쉽게 침범할 수 없게 됐다.

그 결과, 장은 자신의 상하이방 세력을 4세대 지도부 출범 후에도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양성한 후진타오 세력과 협의와 타협을 통해 권력을 분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제도화 작업은 서열에 따른 명확한 직책 분담으로 집단 지도 체제가 형성되면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윤현종 기자>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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