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디지털 시대 ‘호모 픽토르’의 존재 이유는?
라이프| 2012-11-20 11:15
19세기 중반, 대중 누구나 쓸 수 있는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 화가들은 대량 실업사태를 맞았다. 더구나 21세기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미지 생산자’가 될 수 있으니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은 진부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회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각종 쌈빡(?)한 이미지들이 차고 넘쳐서 물릴 지경인 이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그린 그림’이 더욱 뜨겁게 사랑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가장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는 죽지 않는 걸까? 그 이유를 살펴본 전시가 개막됐다.

서울 소격동의 학고재갤러리는 ‘회화의 예술’이란 타이틀 아래 한국 그림판의 중추적 작가인 남경민, 서상익, 이동기, 정수진, 홍경택의 작품을 통해 그 까닭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남경민의 신작 ‘클림트’. 거장에 바치는 오마주이자, 관람객에겐 치유의 그림이길 희망한 작업이다.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이진숙 씨는 “ 21세기에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그림 그리는 인류)가 존속 중인 것은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기 때문”이라며 “차용, 패러디, 오마주 등을 아우르는 ‘메타 페인팅’의 등장도 한 이유지만 인간이 지닌 ‘감각’을 손으로 직접적으로 전하는 회화는 인간이 육체를 가진 존재인 한 본능처럼 작동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디지털 혁명으로 소통의 간접성이 증대되고, 비물질화가 가속화될수록 구체적인 것의 총아인 회화는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작가들의 작업은 이 같은 기획자의 분석을 잘 입증해 준다. 그들이 이번에 내놓은 작품들은 전보다 한결 심화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햐 달려가고 있다.

‘아토마우스’라는 팝아트로 유명한 이동기는 새로운 추상작업과 대중매체에서 제공되는 이미지의 상투성을 색다르게 담아낸 신작을 내놓았다. 또 ‘뇌해도’ 연작을 발표해 온 정수진은 오랫동안 주창해 온 ‘시각이론’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작품을, 현란한 ‘펜’그림으로 많은 팬을 사로잡았던 홍경택은 빼어난 손맛이 느껴지는 구상작업을 내놓았다.

남경민은 기존의 ‘화가의 아뜰리에’ 시리즈에서 성큼 더 나아가, 보다 캐주얼한 분위기의 회화적 식탁을 마련했다. 마네, 클림트 등이 무시로 등장하는 경쾌한 그의 그림은 ‘치유와 소통’이라는 회화의 몫을 차분히 수행하고 있다. 서상익은 또한 미술사를 장식한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를 참신한 방식으로 제시했다.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기획자의 질문에 홍경택은 “21세기라고 해도 어떤 이들은 아직 19세기를, 나 같은 이들은 20세기를, 또 21세기를 사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반면에 정수진은 “나는 회화야말로 최첨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차원을 볼 수 있는 장소는 평면밖에 없다. 평면이야말로 최첨단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이자, 상상의 공간”이라고 답했다. 02)720-1524.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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