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디지털시대,회화는 끝났다고? 아니,21세기 ‘호모 픽트로’는 더 바쁘거든
라이프| 2012-11-20 10:17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19세기 중반, 대중 누구나 쓸 수 있는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 화가들은 대량실업 사태를 맞았다. 더구나 21세기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미지 생산자’가 될 수 있으니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은 이제 진부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회화는 사라지지않고 있다. 아니, 각종 쌈빡(?)한 이미지들이 차고 넘쳐 물릴 지경인 이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그린 그림’은 더욱 뜨겁게 사랑받고 있다. 낯설고 참신한 미디어 아트 보다 그림 전시에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리고, 아트 컬렉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술장르도 역시 회화다. 그렇다면 왜 미술에 있어서 가장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는 죽지 않는 걸까? 그 이유를 살펴본 전시가 개막됐다.


서울 소격동의 학고재갤러리(대표 우찬규)는 ‘회화의 예술’이란 타이틀 아래 요즘 한국 그림판의 중추적 작가인 남경민 서상익 이동기 정수진 홍경택의 작품을 통해 그 까닭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회화의 예술’이란 전시타이틀은 17세기 ‘회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네덜란드 작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작품에서 따온 것으로, 이미 회화의 종말이 여러차례 선언됐음에도 보란듯 잘 굴러가고 있는 회화의 실체를 짚어보기 위해 명명됐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이진숙 씨(‘러시아미술사’, ‘미술의 빅뱅’ 저자)는 “ 21세기에도 ‘호모 픽토르(Homo Pictor:그림 그리는 인류)가 존속 중인 것은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기 때문”이라며 “차용, 패러디, 오마주 등을 아우르는 ‘메타 페인팅’의 등장도 한 이유이지만 인간이 지닌 ‘감각’을 손으로 직접적으로 전하는 회화는 인간이 육체를 가진 존재인 한 본능처럼 작동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디지털 혁명으로 소통의 간접성이 증대되고, 비물질화가 가속화될 수록 오히려 ‘구체적인 것의 총아’인 회화는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섯 작가들의 작업은 기획자의 이같은 분석을 잘 입증해준다. 그들이 이번에 내놓은 작품들은 전 보다 한결 심화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일찌기 ‘아토마우스’라는 팝아트로 유명세를 얻은 이동기는 새로운 추상작업과 대중매체에서 제공되는 이미지의 상투성을 색다르게 담아낸 신작을 내놓았다. 또 ‘뇌해도’ 연작을 발표해온 정수진은 오랫동안 주창해온 ‘시각이론’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작품을, 현란한 ‘펜’그림으로 많은 팬을 사로잡았던 홍경택은 빼어난 손맛이 느껴지는 구상작업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남경민은 기존의 ‘화가의 아뜰리에’ 시리즈에서 성큼 더 나아가, 보다 캐주얼하고 달콤한 회화적 식탁을 마련했다. 모네, 클림트 등 거장들이 무시로 등장하는 경쾌한 그의 그림은 ‘치유와 소통’이라는 회화의 역할까지 차분히 수행하고 있다.
서상익 또한 근현대미술사를 장식한 피카소, 프란시스 베이컨, 장 드뷔페, 에드워드 호퍼,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를 그만의 방식으로 제시했다.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기획자의 질문에 홍경택은 “21세기라고 해도 어떤 이들은 19세기를 살고 있고, 나처럼 아직 20세기인 사람도 있으며, 21세기를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떤 힘의 원천, 힘의 장소, 그런 고유한 것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반면에 정수진은 “나는 회화야말로 최첨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차원을 볼 수 있는 장소는 평면 밖에 없지 않은가? 평면이야말로 최첨단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이자, 상상의 공간”이라고 답했다.

결국 이번 전시는 20세기적인 것과 21세기적인 것이 공존하는 시대에, 자나깨나 화폭 앞에서 작업의지를 다지고 있는 다섯 작가의 예술적 발언을 통해 회화의 미래란 결코 어둡지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사각의 평면은 그들에게 ‘행복한 지옥이자, 불행한 천국’이니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셈이다. 전시는 12월 30일까지.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02)720-1524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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