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나무숲에서 위키까지…일상으로 돌아온 뒷담화
뉴스종합| 2013-03-08 07:57
[헤럴드경제= 서지혜 기자] “밥 먹는 시간이 휴게시간임에도 고객이 부르면 숟가락 던져놓고 뛰쳐나가야 하는게 이 바닥이다.” (대형마트 옆 대나무숲 中)

대형마트 식품코너에서 일하는 고영신(여ㆍ57) 씨는 최근 딸에게 배운 스마트폰으로 140자 트윗하기에 여념이 없다. 고씨는 업무가 끝나자마자 트위터로 ‘대형마트 옆 대나무숲’ 계정에 접속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트친들과 대화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데다 계정 아이디도 ‘대형마트 옆 대나무숲’을 공유해 상대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 없지만, 하루종일 진상손님과 담당 매니저로 인해 겪는 스트레스만큼은 가슴 깊이 공감한다. 벌써 수년째 마트에서 일했지만 만난 지 1년도 채 안 된 대나무숲 친구들만이 고씨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준다.

총선과 대선을 끝으로 ‘나는 꼼수다’열풍이 잠잠해졌지만 SNS를 통한 뒷담화는 여전히 ‘살아있다.’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던 인터넷 뒷담화가 최근 직장, 가정, 개인에 대한 일상적 하소연을 늘어놓는 ‘수다의 장’으로 확대됐다. 개인의 애환을 털어놓는 ‘일상 뒷담화’가 트위터, 위키 등 각종 수단을 통해 유행하고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고 싶은 이들, 대나무숲으로 모여라= 지난 해 하반기부터 유행한 트위터 ‘00옆 대나무숲’은 SNS를 통한 ‘일상 뒷담화’의 시발점이었다. 시집살이에 지친 며느리들은 ‘시월드 옆 대나무숲’에서, 교수님의 말도 안되는 심부름에 폭발한 조교들은 ‘우골탑 옆 대나무숲’에서 ‘뒷담화 놀이’를 시작했다. 출판사, 애니메이션 업계, 언론사까지 소위 고되다고 알려진 모든 직업군의 종사자들은 대나무숲으로 모여들었다.

가장 잘 알려진 대나무숲은 역시 ‘시월드’다. “왜 제사 때는 당신 딸이 아닌 나만 일을 해야 하는가” “나도 명절에 친정에 가고 싶다”는 며느리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140자 트윗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기 시작했고, 대나무숲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학 내에서 철저하게 약자일 수밖에 없는 시간강사와 조교들의 대나무숲인 ‘우골탑 옆 대나무숲’도 아직까지 활발한 뒷담화가 이어지는 계정 중 하나. “교수가 되고 싶다면 석사는 모교에서, 박사는 외국에서 하고 금의환향하라”는 진로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부터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쓸데없이 일만 많이 시키는 교수님”이라는 지도교수에 대한 불만까지 대학 연구실에서만 겪을 수 있는 뒷담화가 이어진다. 

일베 메인화면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내부고발...‘위키’= 대나무숲이 내부자들의 ‘수다의 장’이라면 위키는 각 업체 종사자들이 자신이 일하는 업종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올려 취합하는 일종의 내부고발 백과사전이다. ‘위키’라는 단어는 사용자들이 자유롭게 편집해 집단의 지식을 취합하는 오픈사전 ‘위키피디아’에서 나온 말이다.

가장 큰 화제를 불러모은 사이트는 단연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뒷담화가 총망라된 ‘꿀위키’였다. 꿀위키는 게임 개발자 커뮤니티인 ‘게임코디’가 개설한 사이트로 전현직 게임 개발자들이 듣거나 실제로 경험한 일들을 모아 뒷담화 형식으로 사이트에 게재한다.

이 사이트에는 넥슨, 엔씨소프트, 한게임 등 국내 40여 개 게임업체의 정보가 적나라하게 게재돼있다. 예컨대, ‘야근 수당을 주지 않기 위한 게임 회사의 꼼수’ ‘퇴직금을 주지 않는 방법’과 같은 업계 내부자만 알 수 있는 불만에서부터 “00회사는 게임 개발에 열정적이고 능동적이며 실력 좋은 개발자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는 특정 회사에 대한 뼈아픈 비방까지 올라온다. ‘연봉은 업계 최고 수준이지만 개발 외 직종은 업계 평균보다 낮다’는 구직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도 담겨있다.

위키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누구나 편집을 하며 내용을 다듬어나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같은 내부고발에 반발해 게재 글을 모두 지워도 이전 버전을 불러와 누구나 복구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개방성은 위키피디아가 300년 전통의 브리태니커를 밀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시월드옆 대나무숲 첫화면

▶나의 우스갯소리에 수천 명이 반응한다...‘오 유와 일베’= 다음 ‘아고라’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게재하는 게 보편적이었던 인터넷 게시판 역시 최근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담론으로 채워지고 있다.

지난 달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오유 회식남 사건’이 대표적이다. 오유(인터넷 사이트 ‘오늘의 유머’)와 일베(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는 개인들이 인터넷 유머를 올려 공유하는 대표적인 사이트다.

지난 2월 한 오유 회원이 “회식 날 바래다준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는 글을 게재한 후 수많은 회원들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추측성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댓글은 5시간만에 3000건을 넘어섰고, 리플에 리플을 더해 회식남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조회수만 21만 건에 이르는 오유 사상 최대의 이슈였다. 이처럼 최근 경험자만 공감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넋두리를 네이트판, 오유, 일베 등의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는 문화가 대중화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최근 뒷담화 문화가 개인화된 데는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닌 전 세대를 망라하는 필수품이 되면서 특정 주제만이 아닌 일상의 모든 담론이 SNS의 소재가 됐다는 것. 여기에 SNS의 익명성까지 더해져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종대 트리움(소셜네트워크 분석 기업) 이사는 “개인들은 그간 익명으로 고충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며 “단편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슈를 공유하기에 스마트폰은 더없이 좋은 디바이스”라고 말했다. 또한 “개인적 이슈에 공감하는 불특정 다수를 SNS를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인터넷 뒷담화 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서지혜 기자/gyelove@heraldcorp.com


우골탑 옆 대나무숲 계정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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