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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전쟁 희생자 추모가 끊이지 않는 제국의 심장…미국 워싱턴DC
라이프| 2013-03-29 08:15
[워싱턴=이해준 문화부장]남미에서 미국으로 넘어와 뉴욕~필라델피아~보스턴에 이어 워싱턴DC로 향했다. 미국 동부지역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하지만 대도시 중심으로 여행하다 보니 남미처럼 현지 주민과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맛이나 자연과의 교감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중국ㆍ인도나 유럽처럼 깊은 역사와 문화가 주는 감동도 느끼기 어렵다. 좀 팍팍한 일정이다. 그럼에도 세계의 중심 미국의 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많은 여정이었다. 미 동부의 마지막 여행지인 워싱턴은 지금까지 돌아본 동부 중심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어우러져 오늘날 미국의 본질과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32년째 지속되는 백악관 앞 평화시위=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돌아보려면 모든 것이 거대하게 만들어진 것에 놀랄 각오를 해야 한다. 거리의 건물들은 물론 백악관을 중심으로 한 행정부, 중앙공원인 내셔널 몰의 규모가 사람을 압도한다. 몰 주변에 들어선 박물관과 미술관, 국회의사당, 링컨기념관까지 모두 크기가 엄청나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유니온역부터 기가 질리도록 컸다.

혹자는 포토맥 강변에 신고전주의 건물들이 들어찬 아름다운 도시라고 얘기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위압감과 권위를 느끼게 했다. 고대나 중세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물들이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 같았다.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가 세계경제의 중심을 상징한다면, 워싱턴은 정치ㆍ군사ㆍ외교적 패권주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워싱턴의 외관이라면, 그 속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백악관 담장 건너편의 평화시위 현장과 역사박물관이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백악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가운데 33년째 평화 촉구 시위를 하는 텐트가 외로이 서 있다.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은 워싱턴 최고의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다. 세계 권력의 핵심이기 때문으로, 항상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담장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하지만 더 관심을 끈 것은 담장 건너편에서 펼쳐지는 시위였다. 애칭이 코니인 73세의 콘셉션 피치오토 할머니가 1981년 7월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32년째 벌이는 1인 천막시위였다.

천막엔 다양한 언어로 구호가 적혀 있었고, ‘평화’라는 한글도 보였다. 코니는 이 시위로 ‘평화와 반핵의 불침번’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천막을 지키던 젊은 동료 미라는 “백악관이 평화와 반핵을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하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국이 추구하는 ‘팍스 아메리카’, 즉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평화가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의문이 갔다.

역사박물관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미국의 인식 태도를 잘 보여주는 곳이었다. 박물관은 성조기관과 대통령관, 역사관, 사회관 등 다양한 전시관이 들어서 하루종일 보아도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초점은 독립전쟁 이후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맞춰져 있었다.
 
중앙광장인 ‘내셔널 몰’에서 에이즈 사망자를 추모하는 ‘네임스(NAMES)’ 퀼트전시회가 열리는 가운데 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박물관을 돌아보며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이어 이라크전쟁까지 포성이 멎을 날이 없었다. ‘자유에 대한 대가가 전쟁’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성조기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이 전율을 일으킬 정도였다. 표면상 평화롭지만 워싱턴은 전쟁사령부 같았다.

▶끊이지 않는 희생자 추모제=지난 10년간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은 4400명을 넘고, 이라크 민간인과 군인은 그 40배가 넘는 18만명에 달한다. 매일 사망자가 발생한 셈이다. 그러니 추모제가 끊이지 않고, 희생된 미군은 자유수호의 영웅이 된다. 내셔널 몰의 워싱턴 모뉴먼트 아래 추모공원엔 항상 조기가 걸려 있고, 필자가 방문했을 때에도 추모제가 장중하게 열리고 있었다.

내셔널 몰에 들어선 11개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가운데 인디언박물관은 미국이 인디언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지 확인하고 싶어 들른 곳이다. 박물관은 인디언 전통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멋진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전시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디언의 역사는 파악이 잘 안됐다. 이색적인 인디언 장식과 독특한 문화 예술 정신세계 등을 박제화해 분절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내셔널 몰’ 한 가운데 있는 워싱턴 모뉴먼트 아래 추모공원에서 전쟁 중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미국 형성기는 철저한 인종학살의 시기였다. 미국 대륙을 누비던 인디언들은 유럽 이민자들의 상륙과 미국의 서부 개척과 함게 차근차근 살육됐다. 15세기말 미국엔 200만~800만명의 인디언이 있었지만, 지금은 35만여명에 불과하다. 식민지 개척 이후 400여년 동안 수백만명이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은 그것을 직시하지 않는 듯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링컨기념관 앞 광장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다. 미국 역사의 주요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던 장소이며,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을 한 곳도 이곳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미국인의 함성이 울려퍼졌던 곳이지만, 앞으로 미국이 가야 할 길은 먼 듯했다.

그러고 보니 워싱턴에서 ‘평화’를 강조하는 곳은 백악관 담장 밖의 시위 현장 이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법과 질서에 기반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곳은 많았지만, 인권이나 평등, 정의와 같은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느낌은 갖기 어려웠다. 위압적인 건축물로 가득한 워싱턴은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실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hjlee@heraldcorp.com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모방해 만든 링컨기념관에 많은 관람객이 몰려 링컨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기고 있다.
링컨기념관에서 바라본 ‘내셔널 몰’. 주요 정치 및 사회ㆍ문화 집회가 열리는 광장 너머로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인다.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문화부장은 2011년 10월12일 한국을 출발,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 조카 등 5명이 시작한 이번 여행을 통해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의 새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도 쌓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확인한 사람이 하나씩 귀국해 마지막 여정에선 아빠 1명만 남게 되는 이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는 인터넷 카페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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