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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역에 도전부터 까먹은 내 비밀번호를 찾아서 까지… 인류 도전사, 암호전쟁은 현재 진행형
뉴스종합| 2013-04-19 06:36
[헤럴드경제=류정일 기자] ‘신은 그저 인간이란 존재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했을지 모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류의 기원을 찾아 우주여행을 떠난 지구인들이 직면한 불편한 진실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신에 대한 치열한 도전사일수도 있다. 신이 설정한 암호를 풀어가는 과정이 인류의 발전사가 아닐까.

1970년대 미국의 한 보안업체는 푸는 데만 4경(京.1조의 1만배) 년이 걸릴 것이라며 수학 문제를 냈다. 인간은 슈퍼 컴퓨터를 동원해 17년만에 풀었다. 인간이 지닌 약 2만5000개 유전자와 DNA를 구성하고 있는 30억개의 염기쌍 배열을 해독하는 인간게놈프로젝트(HGP)도 완료했다.

가히 신의 영역에 근접한 듯 보였지만 ‘인간 게놈의 복잡성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정도’라는 과학계의 고백에 인류의 기원은 해독하지 못할 암호처럼 남겨졌다.


숨기고 싶은 원초적 욕구인 암호와 풀어내고 싶은 본능인 해독은 지독한 모순 관계를 형성하며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암호로 유사 이래 수많은 전쟁사가 다시 쓰여졌고 제국의 흥망성쇄와 더불어 숱한 왕들이 목숨을 잃었다.

새로운 암호를 만들면 누군가는 이를 해독하고 방법을 찾아 대응했다. 2차대전 중 V-2 로켓으로 융단폭격을 퍼붓는 독일의 파상공세 속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암호 해독을 위해 저명한 수학자, 과학자, 언어학자, 고전학자, 체스 전문가는 물론, 십자말풀이 전문가까지 총동원했다.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기 탈취를 위해 최신식 잠수함을 동원한 해상전을 서슴치 않았고 미국은 태평양 전쟁의 승기를 잡고자 일본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나바호 인디언의 고유언어를 암호로 쓰기도 했다.


현대로 넘어와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은 암호 기술을 무기의 일종으로 보고 수출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암호를 해독하는 툴이나 데이터를 이용한 범죄 발생 시 공권력이 접수할 수 있다고 보며 무엇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최근 3ㆍ20 사이버테러 당시 방송사와 금융회사 전산망을 마비시킨 악성코드에 추가 공격을 암시하는 암호가 발견되면서 추가 공격 가능성에 온나라가 비상이었다. 로마군 보병대 3개 대열 중 선봉부대를 뜻하는 ‘HASTATI’라는 단어가 발견된 것이다. 누군가는 암호로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했고 누군가는 암호를 해독해 대응했다.

기업은 신제품 관련 정보를 암호화해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세관이나 경매 현장에서는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암호가 날아 다닌다. 또 ‘외계어 아니냐’는 기성세대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각종 신조어를 암호처럼 사용하며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장삼이사의 삶도 암호전쟁 그 자체다. 잠에서 깨어나 만지는 스마트폰의 언락(un-lock) 암호 풀기로 시작해 승용차의 번호 키, PC의 로그인 암호,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 ‘아차’ 싶어 오랜만에 들어간 인터넷 쇼핑몰의 잘 기억나지도 않는 패스워드는 물론, 회사 출입문의 보안 카드, 은행 홈페이지의 공인인증서와 OTP(원타임패스워드), 퇴근하고 돌아온 집의 디지털 도어락까지 도대체 내가 몇개의 암호를 쓰는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개인들의 비밀번호를 통합 관리해주는 앱까지 등장할 정도니 고대 그리스의 ‘스키테일’(사진.그리스어 막대기)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셈이다. 스키테일이란 전쟁 지휘관들이 소지했던 길이와 굵기가 다른 막대기로 풀어 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알파벳만 적힌 양피지라도 스키테일에 감아 보면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었던 인류 최초의 전쟁 암호 기법이었다.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암호는 뜻하지 않은 웃음을 주기도 한다. 지난달 19일 서울 목동 구장에서 열린 2013프로야구 넥센과 SK의 시범경기에서 넥센은 1회초 사인 미스로 2실점했다. 2사 1,2루 상황에서 선발투수 김병현이 포수 박동원에게 ’바꾸자‘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박동원이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공을 놓치면서 폭투가 돼 주자에게 한 베이스씩 진루를 허용했고 곧장 2루타 2실점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프링캠프에서 그토록 익힌 사인이지만 어느 시즌, 어느 팀이나 암호를 완벽히 외우지 못하는 선수가 10%는 꼭 있다고 하니 그 때, 그 선수가 왜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ryu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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